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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Nov 17. 2023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망공포증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다.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몸의 회복도 마찬가지다.





최근 2-3일, 수면의 질이 나쁘지 않았다. 급히 추워진 날씨 탓에 감기에 걸렸는데도 두 번 정도만 깬 뒤 개운하게 일어났다. 하루가 꽤 정상적이고 즐겁게 운용됐다. 하지만 물론, 방심하진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들뜨면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대로 쭉 나아질 거라는, 순탄한 우상향그래프로 잠을 잘 잘게 될 거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당장 오늘의 밤이 어떨지 모르는 게 현실이니까. 행여 다시금 잠과 분투라도 하게 된다면 기대했던 몇 배로 실망이 클 테니까. 희망이 솟구치지 않도록 조급히 마음에 고삐를 맨다.


나에게는 일종의 ‘희망공포증’이 있다.


대개의 만성적인 병을 앓는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증상이 있고 없을 때 마음가짐의 간극이 크다. 마치 조울증처럼 몸의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모든 게 절망스럽다가, 간혹 체력이 올라오는 날에는 마냥 낙관이 넘쳐흐른다. 불과 얼마 전인데도 상태가 안 좋았던 날들을 금세 잊는다. 건강한 날이 평소보다 길게 이어지는 경우 아예 이 희망은 확신처럼 굳어져, 나만 어떻게 잘하면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완전무장 희망 상태'가 된다. 완벽한 회복이 머지않았고 약을 쉽게 끊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내 몸의 컨디션은 의지와 노력만으론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었고 그러면 이제 다시, 암흑기가 도래한다.


불면증에서 벗어나리란 희망이 있던 자리를 실망이 전부 채운다. 실망은 좌절, 그리고 더 나아가 절망과 함께 온다. 그리고 이내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자괴감은 잠시 쌓였던 낙관을 쉽게 무너뜨리고는 나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대로 패자마냥 평생 살 순 없기에 얼마 지나 다시금 희망을 가져보려 일어서긴 한다. "그래, 다시 뭐라도 시도해보지 뭐"하면서. 그렇게 오랜 기간 이 사이클이 되풀이되어 왔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이제 뭘 하든 별다른 차도가 없을 거란 기본 전제를 깔며 일어선다. 회복에 있어 회의적이 된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도다. 애쓰다가도 '얼마나 또 더 크게 실망하려고 또 희망을 갖나', 며 기대를 억누른다. 의지가 되살아나기 위한 쿨타임도 점점 길어진다. 마치 희망공포증이다. 자기 계발서적에서 빠질 수 없는 ‘회복탄력성’과 상반되는 느낌의 단어다.


심해지면 “일반적인 삶은 포기했다.”라고 거창하게 말할 정도로 희망을 경계하게 된다. 이겨낼 용기는 가뭇없어진 지 오래고 차라리 극단적인 비관에 안주한다. 희망공포증은 나를 방 안에 홀로 가두고는 끊임없이 꾸짖는다. 자책을 덕지덕지 붙이고 자괴감덩어리 그 자체가 된다. 


그럴 때의 나는 누구에게도 화가 안 난다. 누가 뭐라 심한 말을 해도, 사소한 일상이 내 의지와 자꾸만 빗나가도 예전처럼 짜증이 울컥 올라오지 않는다. 그저 모두 내 탓이라고 반성하게 된다. 어떨 때는 이 상태가 타자와의 갈등을 피할 수 있고 상황에 침착할 수 있어 ‘이게 더 낫네’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감정의 날이 상대가 아닌 나를 향하게 된 건 분명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15년간 지속되어 온 불면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며 이를 ‘불면일지’라 가볍게 칭할지, ‘단약도전기’라 의욕 넘치는 제목을 붙일지 고민했다. 여기서 또다시, 희망공포증이 작용했다. 결국 전자를 선택한 나는 ‘도전’이 여전히 자신 없고 뒤따라올 좌절이 두렵다. 결국 이대로 이렇게 사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 안에서 최대한 삶을 가꾸는 게 최선일까. 하지만 야속하게도 나아지길 바라는 희망은 끊임없이 피어난다.


잘 자고 싶다.

약을 끊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아닌 힘이 되고 싶다.


질긴 생명력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선 회복에 대한 열망이 식은 적이 없었다.  



 

 I can’t go on. I’ll go on.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희망공포증을 이겨내야 한다. 결국 실망을 염두에 두면서도 다시 힘을 내볼 수밖에 없다. 삶 전체의 여행은 궁극적으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언제나 이 한 걸음만이 존재하며 이 한걸음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어쩌겠어. 또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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