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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25. 2024

어쩌면 진짜 하늘을 날았는지도 몰라

알코올과 자각몽

수면센터에서 새로운 치료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개월 차. ‘술 없이는 다 재미없어!’를 외치던 내가 금주한 지도 딱 그만큼이 지났다.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술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날만을 기다려온 나는 흥청망청 마음 놓고 들떴다.


3차에선 야외 테라스에 앉았는데 바람이 꽤 차가웠음에도 충분히 따뜻했다. 알코올이 열을 올려서만은 아니었다. 요즘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는 귀인들이 있었고, 업데이트된 업계 내 빅뉴스들이 있었고, 술집에서 울려 퍼진 기막힌 음악들이 있었다. 내가 그리 하고 싶다던 술게임까지 하니 대학생이 엠티에 온 것처럼 신나버렸다.


하지만 주제에 맞지 않는 유희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어젯밤 나는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3개월 만에 저녁약을 스킵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엉망이 됐다.


너무나 기다려온 이 날을 위해 이쯤은 참을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사실 조금 힘들더라. 예전엔 자주 깰지언정 술김에 빨리 잠에 들기라도 했는데 그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술과 거리를 둬야겠구나. 평소에도 '어차피 언젠가 알코올을 끊어야 될 날이 오겠지, '  '1급 발암물질이니 나이 들어서까지 이렇게 즐길 순 없겠지'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구나.  


사실 저녁 약 없이 버틴 오늘 하루는 어젯밤 보다 더 만취한 기분이었다. 취기가 주는 들뜸과 유쾌함은 없었다. 그저 현실인 듯 아닌 듯 감정은 붕 뜨고, 감각은 뭉개졌다. 시야는 라섹하기 전 마냥 흐릿했다. 그리고 피로에 찌든 전두엽이 판단력까지 앗아갔다.


대학교 철학 수업 시절 교수님이 음주상태에 대해 설명했듯 [꿈꾸는 이상에 닿기 바로 직전, 언저리에 내몰려 아슬아슬하게 휘청이는 기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는 자각몽을 꿀 때의 감각과도 얼핏 비슷하다. 현실인 듯 아닌 듯 몽롱해지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꿈에서 꿈임을 인식하는 이런 ‘자각몽’을 나는 어릴 적부터 참 많이도 꿔왔다. 어떤 이들은 자각몽, 즉 ‘루시드 드림’을 꾸기 위해 실제로 여러 노력을 하기도 한다. 꿈 일지 쓰기, 꿈속 나만의 표식 만들기 등 매뉴얼에 따라 훈련하는 방법들은 책과 인터넷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루시드 드림을 시도하려는 이들은 하루 권장 수면시간 8시간, 인생의 1/3을 자는데 낭비하기 싫은 열정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잠이 늘 부족했던 나는 굳이 꿈에서까지 의식이 깨어있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게 사실이다. 딱히 기쁠 턱도 없고, 이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하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꿈 속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면, 그저 나는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한다.


첫째. 나의 자각몽은 보통 방 안에서 시작되는데 일단 창문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본다. 둘째. 밖을 보며 고층인지 확인한다. 셋째. 그리고는 문을 열고, 지체 없이 뛰어내린다.


나는 이내 하늘을 날고 있다. <무빙> 속 봉석이처럼.


그것이 내가 자각몽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배경은 주로 밤하늘이었는데, 날고 있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면 펼쳐지는 광경은 글로 형용하기 힘들다. 반짝이는 미니어쳐들이 빼곡히 일렁인다. 모든 것에서 해방된 생생한 기분은 마치 내가 실제로 날았다면 느낄법한 기분과 일치할 것만 같다.


그렇게 멀리멀리 비행하다 결국 도착하는 곳은 늘 특이하게도 영국이었다(서울에서 날기 시작한 지 몇 초 안 걸려 도착한다). 왜일까. 영국이 딱히 제일 좋았던 여행지도 아닌데 굳이 나는 런던아이를 스쳐 날고, 도착하면 어김없이 기념품샵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영국식 악센트를 들으며 젤리를 사는데, 하나만 꺼내 먹은 뒤 남은 젤리를 주머니에 꼭 넣어둔다. 상점에서 나와서는 두 번, 세 번 젤 리가 잘 있나 재차 확인한다.  





평소 되게도 날아보고 싶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도전정신 넘치던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버킷리스트 제일 상단에는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스카이다이빙] 이 세 개가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순서대로 난이도와 비용이 커질 것 같아 하나씩 도장 깨기 식으로 해나갈 작정이었지만, 번지점프만 겨우 해낸 뒤 의욕이 푹 꺾여버렸다. 패기와 객기로 가득 찬 20대에서 의심과 겁이 많은 30대가 된 나는 더 이상 패러글라이딩과 스카이다이빙이 궁금하지 않다. 혹은 어쩌면 이미 꿈에서 충분히 날아봐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떨 땐 꿈이 더 현실 같다. 하늘을 나는 꿈은 특히 '자각'몽이기에 매우 선명해 그 광경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진짜 난 거나 다름이 없게끔 지금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심지어 기억의 진함과 흐려짐이 실제 뛰었던 번지점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수차례 날았으니 사실 어쩌면 더 '진짜기억'에 가깝기도 하다. 이쯤 되면 실제로 날아봤다 해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든다.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가 했을법한 고민과 혼란을 어렴풋이나마 혼자 공감한다.





잠을 못 잤을 때의 나에겐 만취한 것만 같은, 몽롱한 '현실'보다 확실히 생동감 넘치는 자각몽이 더 ‘현실' 스럽다.  꿈인 걸 알면서도 날고 또 날아 영국에 도착한, 에너지 충만한 상황은 그러니 퍽 만족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현실과 이어지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가졌나 보다. 나는 영국에서 산 젤리를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가지고 있길 늘 간절히 바랐다.


안정된 수면상태가 찾아온다면 자각몽도 줄어들겠지 싶다. 나는 깊은 숙면에 빠져 결국 꿈 없이 자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언젠가 이런 시기가 있었지’ 생각하게 되는 날이. 약 없이, 눕자마자 잠에 들어 몇 시간이고 통잠을 잘 것이다. 맑게 잠에서 깬 상태가 만족스러운 날일 것이다. 술 없이도 하루가 온종일 즐거울 것이다. 주머니도 없는 잠옷을 더듬으며 영국산 젤리를 찾지 못해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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