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받아들이기
아무 기대 안 하기로 마음먹은 나 자신에게 몹시 고마운 날. 덕분에 오늘 같은 날도 버틸 수 있다. 정신없이 몽롱한 낮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이리도 괜찮다! 훨씬 덜 무력하고 덜 우울하다. 되레 당연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꼬꼬마 시절의 나는 어른이 된 나의 표어가 '꿈도 희망도 가지지 말고 살자'가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 말이 나를 버티게 할 줄.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며, "나는 이미 수 십 가지의 꿈이 있는데!" 라며 다그칠 어린 나에게 덧붙이자면… 꿈은 못 이루니까 꿈이더라. 그러니 웬만해선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게 속 편해. 그게 사람이든 뭐든. 음...아이한테 할 소린 아닌가.
다시 6월 21일로 돌아가서,
난생 처음 신기한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 당시 내 기분이 뭐랄까, 분명 찌는 듯한 동남아 날씨였음에도 시원했다. 확실히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 것도, 기필코 이겨내리라 다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뭐라도 다르긴 다를 것 같았다. 효과를 보지 못 한 오랜 기간의 치료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무력감을 신선한 치료법이 환기시켜 줬다. 그리고 아직 시도해 볼 치료 방법들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위로받았다.
이틀이 흘러 6월 23일.
같은 약을 복용하고도 그 이틀의 편차가 컸다. 이렇게 차이가 난 적은 또 처음인지라 조금 의아하긴 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맞는 약을 찾고 싶은 마음에 이쯤부터 내 증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통이 시작됐다. 평소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소화가 안될지언정 두통은 오지 않는 편인데, 치료한 날 밤부터 이틀 내내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 머리를 쥐어짜는 기분.
뇌파치료의 부작용이었다. 나는 진통제를 삼키며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그러니 뇌파치료를 계속해서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 보다 이 부작용 때문에 계획했던 치료를 멈추게 될까 봐 염려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약 부작용이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팔다리에서 시작한 근육 떨림은 점차 범위가 넓어지더니 얼굴까지 이어졌다. 표정을 짓기가 어려워지고 젓가락질이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 부작용은 조금 불편할 뿐, 아프지 않고 견딜 만했다. 오히려 처음 겪는 경험이 신기하고 재밌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에 들기 바로 직전 온몸의 근육이 움찔! 해서 깨는 일이 반복되자 드럽게 재미없더라. 나는 다음 날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경련이 아닌, '연축'이라고 하셨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둘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간단히 말해 연축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경련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기존 약에 있었다. 같은 약을 꽤나 오랜 기간 복용해 온지라, 내성을 넘어 의존성이 강해져 있었다. 이를 우려해 조금씩 용량을 줄여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내 몸이 느끼기에 손실이 컸나 보다. 결국 다시 복용량을 올려야 했다.
참. 그리고 ‘꿈도 희망도 가지지 말고 살자'는 사실 짧은 버전이다. 긴 버전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가지지 않는 대신 현재를 살기. 이미 전부 이루어졌다.’ 는 식의…어린 내가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대충 달래는 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