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으로 되짚는 나의 7월
그리고 7월이 시작됐다.
바야흐로 <뇌파치료+약물의 적응기간>의 달이었다.
점차 강도를 높이던 뇌파치료는 맥시멈 세기를 찍었다. 이제 더 이상 간질간질이 아닌, 찌릿찌릿 이었다. 두통이 사라진 대신 치료 자체의 고통이 수반됐다. 계획이 중지되는 게 제일 무서운 나는 "따끔거리는 정도"라고 말했지만.
기존 약물은 전부 새로운 약들로 대체됐고, 조금 지나서부턴 이 약들의 용량도 서서히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처음 병원에 찾았을 때부터 나의 목표는 단약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이에 따라 수면 질이 너무 큰 폭으로 떨어진다는 데 있었다.
약을 줄여나가는 과정은 단연코 순탄치 않다.
7월 중순.
악몽이 심해졌다. 원래도 워낙 자주 악몽을 꿨지만, 이번엔 뜻 모를 괴성이 더해졌다. 악몽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괴성을 지른다든지) 때를 확실히 알고 싶어 그때부터는 빈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주로 언니가 알려줬다. 그리고 꿈을 줄이는 약이 추가됐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 방광염에 걸려버렸네! 수면을 어찌나 방해하던지 약의 효능을 제대로 보고할 수 없어 난처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증상들에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러니 저러니 견디며 지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지난밤 내 괴성에 대해 말해주며 갑작스럽게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까지 견디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언니에게 농담 삼아 신내림과 굿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는 잠시 어이없어하다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애초에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었나 보다. 엄마처럼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다사다난한 적응기간이었다. 그리고 언니의 출국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치료기간 동안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루종일 언니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부지런히 흘렀고 언니는 머지않아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애처럼 점점 불안해졌다. 갑자기 생길 커다란 공백이 두려웠다. 그래서 일주일의 기간을 잡고 서서히 언니와 멀어지겠다는, 유치하고 애처로운 계획까지 세웠다.
사실 언니가 없어도 다 견딜만한 치료들이다. 약의 부작용도, 악몽들도 여태껏 그래온 것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다 안다. 아는데… 그냥 그런 것뿐이다. '언니가 가면 이제 소리 내서 웃는 일은 없겠네', 싶은 거. 혹은 '덜 즐겁고 덜 평안하겠네, ' 또는 '다시 우리 집엔 적막이 찾아오겠네' 싶은 그런 거.
언제 또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 또 언니와 악동뮤지션의 화음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 뿌듯하게 엄마 앞에서 선보일 수 있는 날이 정말 언제 또 있을까.
올여름 나는 부모님에게 받지 못 한 공감을 언니로부터 넘치도록 받았다. 때로는 말로, 어떨 땐 행동으로 나를 위로해 줬다. 말도 행동도 보여줄 수 없는 경우엔 언니는 또 다른 방법을 금세 찾아냈다.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시체처럼 누워있던 그날. 나는 피로에 찌들어 자책만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생각을 멈추기로 결심한 나는 뜬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언니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는 알림이었다. 눌러보니 미약하게나마 무지개 끄트머리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언니는 무지개가 내 방에서도 보일 거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굳이 일어나 암막커튼을 열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언니가 보낸 어렴풋한 무지개 사진을 마주했을 때, 마음속에 딱 저만한 불이 켜졌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