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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May 04. 2022

"아빠, 자장가 같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기분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집에 가던 늦은 저녁.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피로가 쌓인 나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 습관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의 머리 결을 스쳐가는 이 바람이 좋은 걸”     


‘앗! 김현철이다.’      


신이 났다. 어렸을 땐 그저 그랬는데, 나이 들면서 좋아졌던 가수이다. 기분이 좋아져 묵언숙행을 하던 입을 움직였다.     


“이 노래가 아마 <오랜만에>일 거야.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18번을 밝힌다. 거기서 끝나도 좋으련만 굳이 노래를 시전하는 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기분~”     


갑자기 고막 테러를 당한 아들의 반격이었을까. 생생한 고음불가를 가만히 듣던 아들이 나긋이 말한다.   

  

“요즘 MZ세대는 이런 노래 안 들어!”     


아니, 갑자기 웬 세대 타령? 선우의 반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랩을 좋아하는 나한테 이 노래는 자장가 같아!”     


선우는 마치 쇼미더머니에서 디스랩을 하는 래퍼같았다. 나한테 속사포로 한방 먹이고, 깔깔 웃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도 웃음이 터졌다.     


조용하던 차 안이 순간 시끌벅적해졌다.      


“이 노래가 시티팝의 원조야. 좋지 않아?”라는 나의 변명은 웃음소리에 묻혀 저 멀리 떠나가버렸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누워 자려는데, 좀 전 차 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웃음이 다시 나왔다.     


사실 BTS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엊그제 나온 싸이의 신곡을 듣는 초4 아이에게 <오랜만에>는 완전 구닥다리 노래일지 모른다. 30여 년 전에 나온 노래 아닌가.     


하지만 옛날 노래 하나로 가족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요즘 별로 웃을 일이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갔고, 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져 입을 꾹 담고 있었다. “너무 힘들고 짜증나!”라고 볼멘소리를 낼 때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짜증과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아내는 “힘들다는 말 좀 그만해!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라며 팩트폭행을 날리는 일상이었다. 더 괴로웠던 건 그나마 갖고 있던 미래에 대한 무지갯빛 전망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래! 한번 더 힘을 내 봐야지!”라는 자기 암시도 줄어들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 뿐...     


이런 삶이 도돌이표처럼 하루하루 되풀이되고 있다. 

그렇다면 선우는 어떨까. 선우의 삶을 돌아보았다.


영어에 한창 흥미를 느껴 매일 새로운 단어를 내게 퀴즈 낸다. 청소년수련관에서 배우는 농구가 끝나고 난 뒤에는 오늘 경기를 생생히 중계해준다. 웬만한 전자 기기는 나보다 더 잘 다룬다. 매일 “공부하기 싫어!”하며 수십 번을 외치지만, 하루의 몫은 거뜬히 끝낸다. 아직도 안방에서 자겠다고 자기 베개를 가져와 어리광을 부린다. 손꼽아 자신의 생일을 기다리고, 무슨 선물을 받을지 하루종일 인터넷으로 찾으며 고민한다. 어떨 때는 아빠엄마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그렇다. 선우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삶을 누구보다 성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때로는 짜증도 내고, 심술도 부리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묵묵히 살고 있다.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 나이에 맞는 말을 하고, 그 나이에 맞는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선우의 모습을 보고, 나를 돌아본다. 난 너무 내 문제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내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다 진정 나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혹시나 별로 큰 문제도 아닌데, 너무 확대 해석한 건 아닐까. 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옛날 노래 한 곡 때문에 가족이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노래 한 곡 때문에 깊이 침체되어 있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노래 가사를 다시금 찾아보았다. 수십 년 전에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고, 과거의 순간들이 떠오르는 것 같다.      


“나는 또 뒤돌아보지만
내게 남아있는 건 그리움”     


과거가 눈이 시리도록 그립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리움의 감정은 오늘까지만 누려야겠다. 그리고 내가 숨쉬고 있는 지금을 잘 살아가고 싶다. 묵묵히, 부지런히...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면 또 수십 년이 지났을 때 나는 지금과는 다른 마음이지 않을까...  혹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 열심히 살았구나....’    
 

ps. 선우야. 그래도 한번 아빠가 예전에 들었던 노래 들어 볼래...(굽신) 서태지도 있고, 이승환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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