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와 폭발, 그 사이

Every coin has two sides.

by 빛율

"어릴 때는 남들도 다 그 정도는 구별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느끼는 대로 말했

을뿐인데 관심을 끌려고 허풍을 떨고 엄살을 부리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타인은 조가 느끼는 만큼 느끼지 못했다. 자기에게는 분명한 사실

이 타인에게는 거짓말로 들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학

생이 되어 온도와 습도에 따라 달라지는 분자운동을 배우면서 자기와 타인의 감각

정도가 어째서 다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는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자

기의 감각이 맞고, 타인의 감각도 맞는 것이다. 각자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


- 오늘의 커피, 최진영


아이가 영어를 거부했을 때. 막 한국어가 폭발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영어 노출을 늘리고 영어로 말 걸어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저하지 말고 그냥 좀 더 일찍 시작할 걸-' 하는 후회와 동시에 '너무 이른가, 역시 만 3세까진 모국어인가'하는 마음 사이를 어지럽게 오고 갔다. '아이가 너무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 주저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인가' 엄마 마음을 정말로 신같이 알아채는 아이라 늘 고민했다. SNS 속 다른 엄마들처럼 나오지 못하는 하이체어나 범보의자에 앉혀서 끝까지 책을 읽어주는 게 맞는지, 아이를 묶어두고 강제하는 게 싫어서 하이체어의 윗부분도 빼고 자유롭게 오르내리도록 해주었던 나였기에 아이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한 자리에 묶어둔 채로 밥을 먹이거나 책을 읽어주는 데 대해 내적인 반감이 컸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줘 본 일이 적었다. 아이는 거의 늘 조금 보다가 다른 데로 가버렸으니까.


아이의 영어 거부 반응은 이랬다. 눈을 비비거나, 손의 거스러미를 뜯거나, 나를 노려보거나, 책장을 덮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가버리거나, 졸린 듯 젖을 찾았다.


어차피 오가는 것이니 개의치 말고 영어로 말 걸어주거나 노출하는 것을 루틴처럼 계속해나가라는 조언을 전문가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나라는 엄마는 참 그게 안된다. 아이의 불편함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민감도가 높은 엄마라 나의 감각을 신뢰하는 만큼 있는 일을 없는 듯이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반응과 상황, 마음과 준비도에 맞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조금 버거워하고 부담스러워하면 잠깐 멈췄다 가야 엄마에 대한 신뢰감뿐만 아니라 영어 정서도 해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새 어린이집 적응 기간과 맞물려 역시나 영어 거부가 찾아왔다. 힘이 빠졌다. 영어 육아 실천을 위한 모임이나 스터디에 많이 가입했는데 막상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엄마의 숙제를 위해 실천하자니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해야 즐겁게 같이 할 것인데 그저 꾸역꾸역 나를 위한 자기 계발로 생각하고 적당히 해나갈 뿐이었다.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내 영어 공부의 목표는 뭐지?'


'내 아이의 영어 노출의 목적은 뭐지?'


'나 또 이렇게 휩쓸리고 있는 건가?'


'누구를 위한 모임이고 스터디인가?'


그 와중에 아이에 대한 건 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 흘러가보기로 했다. 내 영어 회화 공부를 위해 컬컴도 방문해 스터디 모임 리더로 지원도 해보고, 영어 모임을 위한 지역 내 지원 사업 공모에도 참여했다. '내가 좋아서'라는 것에 집중하면서 영어를 계속 붙들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면서 '자막 없이 들리는 영화 영어'를 들었고, 우연히 써먹을 기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재미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영어 모임을 했다. 아이의 원 적응도 어느 정도 되어 정서적으로 편안해 보였고, 모임을 시작한 지도 3개월 남짓이 되니 아이도 이 루틴에 적응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심지어 이동 주차를 위해 아기를 혼자 두고 갔는데도 전혀 엄마를 찾거나 울지 않았다. 그 공간에 머물러 함께 영어책을 읽어주는 걸 듣고 있었다고 하니 정말 신기할 정도다.


영어 모임 내내 차분해 보이는 아이. 참 순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다 집에만 오면 한국어가 폭발한다. 영어를 통해 한국어나 언어 중추가 자극을 많이 받아서일까? 아니면 모르는 언어에 계속 노출되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한국어로 폭발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상당히 놀랍도록 반복적으로 영어 모임 직후 아이의 한국어 발화는 정말 활화산 같았다. '그 많은 얘기들을 그동안 어떻게 참았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는 영어에 대해 거부와 폭발을 반복하고 있지만 긍정적으로 수렴해가고 있다. 내가 천천히 또박또박 점진적으로 노출해 주면서 알아들을만한 상황에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노출만 해주는 내 아이만을 위한 고유한 영어 노출에 대한 감각을 찾아가고 있다. 모든 아이의 속도와 정답이 다르기에 내 아이의 엄마로서 나는 나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작은 도서관에서 원어민이 읽어주는 영어 그림책.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지루함이 보일 때쯤 우쿨렐레나 악기 연주로 함께 노래와 동작도 해나가면서 신나게 두어 시간 영어로 떠들고 나서 함께 먹는 분위기 좋은 점심 식사! 거기서 아이들이 새롭게 시작한 기차놀이! 같이 놀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영어가 스며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아이가 원어민의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영어에 대한 정서가 엄청 좋아져서 엄마가 집에서 말을 걸어도, 책을 읽어줘도 전처럼 바로 덮거나 가버리지 않고 좀 더 오래 듣기 시작했다.


함께 모임에서 정을 나누다 보니 아이들을 위한 활동 아이디어들도 쏙쏙 나온다. 부활절 달걀을 꾸미고, 숨겨두었다 찾는 'Egg hunt'활동을 준비해 주시는 엄마들. 나는 활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잡다한 서류 제출을 하면서도 엄마들의 아이디어를 지원할 수 있어서 마음이 되려 기쁘다.


우수학습동아리 지원을 계기로 커져가는 모임의 정관, 회칙을 만들고 다듬을 수 있었다. 며칠 밤을 불태우다 감기가 좀 심해지긴 했지만, 숙원사업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감기도 씻은 듯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월 2회, 새로운 회원을 모집할 때 어떤 기준을 둘 지 확실히 정해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음 주부터는 컬컴 리더로 봉사하면서 리딩과 스피킹, 문법과 표현 공부를 함께 매주 2~4회 루틴으로 만들어나가야지. 그리고 우리 모임과 어떻게 엮어나갈지 차분히 그려봐야겠다. 우수학습동아리 선정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리면 좋겠다. 이렇게 꿈꾸던 공동체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면서 대가 없이 좋은 정보와 에너지를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갑자기 신입 회원이 늘면서 한동안은 숨이 잘 안 쉬어지고 조금 부담이 되기도 했는데, 얼마 만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며 가족과 편안한 주말에 온전히 집중했는지! 이 2주의 루틴- 모임과 가족과의 시간 사이에 들숨과 날숨처럼 리듬이 생기고 있다. 하아. 이제야 깊은숨을 쉰다. 잠시 멈췄던 운동을 시작한 덕분이기도 하겠고, 체증 같던 우수학습동아리 신청도 마무리되어서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글을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주는 멤버가 생겼다. 얼마나 감사한지!


불안과 조급증, 열등감에서 성취감과 자신감, 행복감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이도 거부에서 폭발로 나아가고 있다.

남편도 모임에 대해 달갑지 않음에서 관망을 지나 자발적 참여로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엄마와 아이, 우리 가족 모두는 함께 나아가고 있다.


뭐든 함께라서 삐그덕 대지만 함께이기에 행복하고 함께라서 지속할 수 있다.

이렇게 더디지만 발맞추어 나가다 보면 어딘가에 다다르겠지.

그게 어디든 우리 계속 이렇게 서로의 보폭과 속도에 귀 기울이며 손 꼭 잡고 가자.

나의 예민함과 섬세함이 참 감사하다. 나를 꼭 끌어안는 밤. 수고했어.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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