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잊을 수 없는 공기

australia, sydney 2014

by 느림주의자

뭔지도 모르고 신청했던 데미페어는 내게 큰 실패작이었다. 제대로 말이 안 통한다며 번역기를 돌려버리는 세상 무서운 영국에서 온 흑인 집주인 아주머니도 혹시 싸우는 거냐며 계속 말을 거는 눈치라는 게 있을 리 없는 4살짜리 집주인의 아이도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아이가 방학이 끝나기 전에 집을 비우겠다고 말을 대충 끝내고 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왔다. 돈도 없는데 집은 어떻게 구하지, 방학 끝나려면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여기에 왜 온 건지, 이유도 없이 여행에 흥미도 없는데 그냥 미국을 대신해 떠나고 싶은 마음에 훌쩍 와버린 호주의 모든 공기가 나를 반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비행기 시간을 착각했고 공항버스를 놓쳐버렸다. 길을 제대로 몰라 운전은 위험하다는 아빠의 말에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는 공항행 택시를 탔다. 부랴부랴 도착한 주말의 공항은 낯선 공기와 설렘의 공기가 공존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였을까 핸드폰 정지를 깜빡한 나는 급히 114로 전화를 걸었고, 바보같이 분실정지를 해버린 사실을 안건 호주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이었다. 핸드폰을 아무리 껐다 켜도 가까운 우체통에 넣으라는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나 이렇게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게, 다행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지 한 시간쯤 지나서야 비행기 옆자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호주에 도착해 엄마에게 연락을 남겼고, 집주인과도 상봉했다.
비행기 옆자리 아저씨는 내게 23살 밖에 안된 아가씨가 이렇게 혼자 다니는 걸 보니 기특하고 용감하다고 힘을 주셨다. 나는 그래도 아직 이렇게 처리를 못하는 걸 보면 부족한 점이 많다고 했지만 사람은 항상 실수를 한다고 날 위로해 주셨고, 시드니에 도착할 때쯤이 되면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오페라하우스를 한번 보라고 말씀해주셨다. 비행기 안에서 본 웅장했던 오페라하우스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살아가는 게 언제 그리 쉬웠던 적이 있냐만은, 핸드폰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외국은 참 막막했다. 노트북이 없으면 부모님과 연락할 수 없었고, 누군가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사전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움이 정말 받기 싫었지만 결국 나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 새 핸드폰을 구매하기로 했다. 무슨 패기였는지 호주에 왔는데 한국말은 하기 싫다며 시티와 한 시간 반 거리에 살고 있던 나는 핸드폰을 사기 위해 시티를 나가려면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아직은 영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혹시나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킬 수 있는 사전이 없었기에 노트북을 켜 구글맵에 검색한 것들을 그대로 적어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Cambramatta역 까지 가는 버스번호를 모조리 적고 그 버스들의 시간표와 전철역에서 두 번을 갈아타 시티에 도착할 때까지의 전철 시간표, Town hall역에서 Frisbe까지 가는 지도를, 혹시 모를 일들을 대비해 정말 상세히 빼곡히 적어 집을 나섰다. 무슨 조선 시대 사람도 아니고 적은 글들을 보며 가는 나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별 수 없는 내 업보였다.

온종일 정신없이 안 되는 영어를 해가며 시티 안을 헤매다 모든 걸 해결하고는 긴장이 덜컥 풀려버렸다. 밥이라곤 집에서 먹고 온 시리얼이 전부였는데 찬바람을 맞으니 엄마의 미역국이 생각났다. 와이파이만 되는 새로 산 핸드폰을 가지고 무작정 걸었다. 처음 온 시티를 구경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때가 되고 나서야 내가 시드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누가 봐도 처음 시드니 시티에 온 사람처럼 열심히 걸었다. 이제는 와이파이라도 되는 핸드폰이 있으니 그냥 내가 어디인지 신경 쓰지 말고 걷자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고, 길의 끝에 거짓말같이 선물처럼 바다가 자리했다. 멈춰 서서 큰 숨을 쉬며 멍하니 정말 멍하니 그렇게 시드니의 첫 바다를 바라봤다.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의 설움이 떠오르더니 이내 코끝이 찡해졌다.


시드니, 그곳은 날 것 없이 꾸밈없이 마냥 그렇게 마음을 울릴 수밖에 없는 그런 도시였다. 혼자 오는 첫 외국인 이곳에 도착해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떠오르면서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게 느껴졌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나 이쁠 줄은,

“나는 지금 시드니의 오후 7시야.”

이 광경을 본 누군가가 이 문장을 읽으면 모든 걸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이 그렇게나 황홀했다. 그날 나와 약속했다. 어떤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 이곳에서 많은 날들의 하루 중 이 시간만은 절대 잊지 않기로, 또 그림자가 길어져있는 늦은 오후를 사랑하기로


혼을 다 빼놓은 하루하고 반나절이었다. 뭣도 모르고 무작정 걷다가 만난 이곳의 첫 바다와 첫 오후 7시, 그 바람, 소리, 빛, 공기 모두 절대 잊을 수 없는 보물 같은 무언가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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