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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Nov 15. 2017

지극히 사적인 말하기, 손 잡기.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을 읽고

  9월의 어느 저녁, 북토크가 끝나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서서 내가 책을 읽고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역시 글로 써야 맞지 싶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노트북을 켠 후 일기를 쓰는 느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자에게 보내는 답례이자 나 자신에 대한 당부이기도 한, 지극히 사적인 글이었다.


  그러니까,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이 출간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빚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기뻤다. 친구가 책의 저자가 되었고, 디자인이 꽤 잘 되었다고 느꼈고, ‘사적인 페미니즘’이라는 수사는 나에게 낯선 것도 아니었다. 일이 잘 풀리는 느낌. 내 일도 아닌데 그게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런 느낌이 퍽 반가웠다. 최근 마음이 복잡했던 탓이다. 생에 대한 욕심과 미련, 죽음에 대한 공포, 아득한 세계의 연장, 거대서사인 전체집합 앞에서의 미력(微力). 평소에 잘 놀라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라, 스스로가 잊고 있었지만 내게는 이런 유치하고 자의식이 끓어 넘치는 못이 있었다. 말하자면 현실 너머를 지금-여기로 단박에 소환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단박에 개인적인 유토피아를 축조하고 싶은 아주 꼴사나운 욕망 같은 것을 계속해서 삼키고 있는 못이었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인지라, 지금 여기서부터는 광막한 바다만이 너른 채, 사실은 지금 여기가 맨 앞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물 위를 걸어가야 하는데도, 배 한 척 발견하지 못할 것만 같은 긴 여로라고 느껴졌다. 이렇게 싸워가다 보면 무언가 오긴 오는가. 기약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로 속이 답답했다. 화병이 나려면 사람이 어떻게 화가 쌓여야 하는 건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이해가 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사람이 정말 인간적으로, 이렇게 끙끙대는 사람들이 있으면 고도 씨의 심부름을 온 소년이 있어야 했다.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구? 내일은 틀림없겠지? 여기에 모두 네, 라고 대답하는 징후가 있어야 했다.


  그러던 중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이 출간되었다. 학교 앞의 책방에 주문을 넣으면서 좋은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사장님께서 아는 사람이 쓰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하셨다. 그땐 이렇게 생각했다. 저게 그렇게 티가 나는 말인가? 나중에 돌아보니 난 이렇게 생각했어야 했다. 아직 읽지도 않고 좋은 책이라는 걸 무슨 수로 보장한단 말인가?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라면 인정(人情)의 영역이고, 저자가 써온 글에 대한 신뢰라면 예측의 영역이다. 두 가지가 모두 작용한 판단이지만, 그 두 가지 원소만으로 좋은 책이라는 판단은 완전한 집합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공백이 있다. 게다가 내가 모르는 다른 저자들의 글도 있는 상황 아닌가. 이런 빈틈을 채우는 건 전망이다. 난 모르는 새 나름대로 전망을 가지고 말한 셈인데, 정작 내 마음관리에는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제목이 의미하듯이 책의 내용은 저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언어로 정돈한 것이다. 그리고 네 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상황, 다른 맥락에서 구성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축자적으로 ‘다양하다’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공통된 문제의식을 배면에 깔고 있고, 개인적으로 살짝 변개해서 오독하자면 그것은 ‘공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제 거의 지나간 여름, 『바깥은 여름』을 읽을 때, 「노찬성과 에반」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리면서 나는 ‘공생’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우리는 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로를 죽이면서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김애란이 ‘어쩔 수 없’이 공생의 진상을 고발하는 것은 당연히 서로를 죽이지 않고도, ‘어쩔 수 없’다는 말 없이도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다.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의 저자들이 말하는 바도 그러하다. 책의 부제,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은 바꿔 말하자면 ‘나를 죽이는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이다(당연히 여기서 ‘죽이다’는 특정한 살해행위에 한정한 표현이 아니다). 김애란이 눅진하게 써내려간 ‘공생’을 재전유하는 것, 나는 저자들의 언어가 그런 시도로 읽혔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개인 주체가 단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목소리를 끌어올려야 하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제도화된 영역에 대신 기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어떤 시도’를 저질렀다.


  내가 빚이 생긴 기분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나, 자문했을 때 솔직한 대답은 ‘아니’였다. 상당히 구식의 비유지만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빚이 생긴 내 기분이란 것은 마치 최루탄 가스가 매캐하고 숱한 소란들이 뒤엉킨 바깥을 생각하면서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앞선 세대의 누군가들이 가진 부끄러움과 비슷한 것이었다. 경험해보지도 않은 심정을 그럴싸한 비유인 양 쓰지 마라, 이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부끄러웠다.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자리에서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데 내가 막막하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 이 부끄러움-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이 아무 말이든 쉽게 쓰이는 부끄러움과 만나면 나는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끙끙대는 장삼이사로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동시에 이 부끄러움은 말하기의 필요성을 확언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데올로기의 벽은 공고하다. 한쪽에서만 두드려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222)” 줄탁동시다. 거대한 외부를 향해 껍질을 쪼는 이 사적인 언어들 앞에서, 외부를 내파하며 껍질을 쪼는 언어들이 호응해야 하는 국면이다. 목소리를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제 목소리로 시대의 소음을 만들어야 한다.


  결국 전망이 필요하다. 고도 씨의 심부름을 온 소년은 고도 씨는 뭘 하고 있냐?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라는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네, 라고 대답했고 그럼? 이라는 뒤이은 질문에 아무 것도 안 해요, 라고 대답했다. 애초에 고도는 능동적으로 접근해오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문학을 배우면서 한 번도 현실 너머가 이 땅에 절로 강림한다고 배운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이미 결론 낸 명제였다. 현실 너머를 현실에 겹쳐서 보는 전망이 필요한 것이라고. 나무를 심는 사람의 전망 같은 거지. 아니 근데 이걸 누가 모르냔 말이지... 아무튼.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을 읽고, 북토크에 다녀온 시간들은 지나간 앎들을 새삼 마인드팰리스에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간 앎뿐만이 아니라 지나간 글 또한 지금의 가난한 언어보다 좋았던 게 많은 법이다. 얼마 전 약 2년 전에 블로그에 적었던 일기를 다시 읽었는데, 시작부터가 최근의 내가 그때에도 있었던 것 같은 동질적인 경험으로 시작하는 것이 마치 이쯤 되어 읽으라고 미리 써둔 것 같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할 일은 막막함과 함께 해양쓰레기처럼 쌓여가고, 눈은 침침해져 있고, 눈 밑이 떨리거나 미세한 경련이 오는 일이 간혹 있는 걸로 보아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어서 이틀 정도는 잘 쉬어야 하는데 일단 3주 정도는 휴식을 미룰 수밖에 없으니까, 괜스레 잔 생각들을 정리하는 차분함을 발휘하여, 포스트쓰기를 눌렀다.

좋은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다. 내 신발 중 구두를 빼면 유일하게 비 오는 날 신을 수 있는 부츠를 신으며 생각했다. 현금이 없는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면 농협에 가야 하고, 농협에 들르는 날의 절반은 버스정류장에 가기 전에 내가 타는 버스가 한 대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생은 그런 것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를 보낼 때가 줄곧 있는 것. 그리고 준비된 후에 타는 버스는 거의 대부분 목적지에 잘 도착하지만, 도로가 얼마나 쾌적할지, 사고가 날지, 기름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등등을 우리는 모른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버스를 타고, 타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하곤 한다. 익숙한 반복이 만드는 일상 속에 숱한 확률변수와 우연, 기적이 맞물려 생은 어딘가에 도달하고 또다시 도달한다.

자신을 가누는 일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강한 사람이라도 예외 같은 것은 없다. 몇 걸음만 움직이려고 부츠를 까치발로 신고 걸을 때 생각했다. 뒤가 꺾일 듯 말듯 비칠비칠 옮기는 걸음은 가끔 재현물 같다. 생을 영화적으로 바라볼 때 나라는 기계-신체가 재현을 시도하는 것 중에는 추상명사 자체로서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과 계획된 도시공간, 유행하는 복식, 일반화된 문화적 양식처럼 운위하기 편한 도구들이 많지만, 주체를 구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또다른 부분은 우산을 말리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나, 티브이를 시청하기 위해 선택하는 자세, 즐겨 앉는 자리에 따라 형성되는 시선의 습관 같은 신체의 풍속이다. 다른 이와 손 잡을 때 휘말리는 흔적-진행들은 개별적인 주체성과 공동의 주체성 사이에서 얼마나 긴밀하게 교호할지.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어떤 파문을 생성할 테고, 그 미시서사가 설명해주는, 코드화된, 주체성과 세계의 민낯이 발견될 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현이다. 재현되지 않는 세계의 민낯은 손을 잡는 순간에 존재한다. 누군가와 손 잡는 일이 이렇게 급진적(?)이다.

그리고 다시, 좋은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다. 이 일기 두 토막을 늘어놓자고 읽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제목과 첫 두 연 정도만 가물거리는 유희경의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떠올린다.     


  마지막 문단에 언급한 것처럼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의 패러디 문장을 통해 쓴 저 일기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추억하는 건 손 잡는 일에 관한 부분이다. 북토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친구가 손을 잡아주었고, 그 감촉을 아직 기억한다. 세계의 민낯을 보려면 우리는 자꾸 손을 잡아야 한다. 그만큼 급진적인 것도 별로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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