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의 2주가 지나고 집으로 왔다. 지난주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듯한 감기가 예상치 않게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하루는 괜찮았다 하루는 침대랑 일체가 되었다 한다.
집에 오고 나서 나의 생활은 더 단조로워졌다. 움직임은 반대로 더 부산스러워졌다. 방 안을 돌아다닐 때에는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목발도 쓰고, 화장실 문 앞에는 간의 의자도 하나 두었다. 화장실 바닥에 물이 없을 때는 모르겠으나 물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미끄덩해서 엄청 놀랐다.
아침은 여동생이 차려주고 치우고 출근을 한다. 저녁은 바퀴 달린 의자에 교정기를 찬 다리를 얹고 재주부리듯 한 접시 차려, 그 의자에 그릇을 올리고 목발로 밀어서 방에까지 들고 와서 먹는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남동생은 먹고 싶은 게 없냐고 전화도 해준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 한 달 넘게 안 읽는 현실 남매인데.. 요즘 그 관심과 사랑을 즐기고 있다.
나 또한 기괴한 모습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최소한의 도움으로 생활을 꾸리고자 노력 중이다. 동생들은 내 모습을 보고 웃는다. 그래 ㅋㅋ 웃자 이럴 때 함께 웃는 게 일류다.
이곳 나름의 유쾌함과 따뜻함이 있듯 내 병원 생활에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1. 머리 감는 날
내가 지낸 간호 통합 병동은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만큼 보호자들이 와 줄 수 없는 시간에 돌봐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신다. 그리고 월, 수, 금은 머리를 감겨 주신다.
행님이 함께 있어 주는 며칠 동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머리카락 없는 사람이 감겨주는 것이라도 내 두피에 물이 닿는 사실만으로 시원했다. 완벽하게 씻겨내려가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기갈 나는 리액션과 폭풍 칭찬이 없으면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러다가 행님이 가고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손길로 머리를 감겨주신다고 해서 냅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오 마이 갓. 나는 신세계를 맛보았다.
능숙하게 휠체어 각도를 조절하시고, 내 목과 다리에 어떻게 하면 무리가 덜 갈지 설명해 주셨다. 수건을 먼저 그 위에 비닐 가운 그 위에 물이 튀는 것이 방지되는 것까지 3중으로 목에 두르고 선생님은 머리를 감겨 주셨다. 머리도 많이 길었고, 24시간이 지나면 기름이 흐르기 시작하는 내 머리를 들이밀면서 민망함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시간을 더 기억에 남게 만들어 준 것은 요양보호사님의 말씀이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샤워도 못하고 하는데, 머리라도 시원하게 감겨 드리면 환자분들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따뜻한 마음이 손끝에서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퇴원하기 전날까지 요양 보호사님 덕분에 꼬질함을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2. 항생제 주사는 아파유
입원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주사를 놓는 혈관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찌르면 터져 다른 곳을 찾고, 겨우 찾아 찔러 넣은 주삿바늘을 몸에 꽂고 있는 건 너무 힘이 들었다.
아침, 저녁마다 진통제와 항생제를 주사로 해서 맞아야 했다. 묵직하게 들어오다 이내 퉁퉁 부어버리는 내 피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간호사 선생님한테 주사 놓는 속도를 조금 천천히 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내가 무척이나 아파하는 것을 알고 간호사 선생님은 주사를 놓으면서 바늘이 지나간 바로 윗부분의 피부를 문질 문질 해 주셨다. 어릴 때 엄마 손은 약손 하면서 배를 문질러주면 통증이 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문지르며 주사를 놓아주시니 아픔이 조금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아픔에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고통보다는 고마움에 통증이 덜 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간호사 선생님의 제스처를 본 뒤, 그 선생님이 오지 않으셔도 나는 주사를 맞을 때 혼자 문질렀다. '괜찮아~ 이거 맞고 나면 내일은 덜 아플 거니까 조금만 견디자.'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3. K 차녀 막남이의 특별 케어.
나는 셋 중 장녀다. K 장녀라고 하기에는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예전에는 최전방에서 엄마랑 유대를 쌓고 지냈다. 이제는 내 공백을 동생들이 잘 채워주고 있다.
내가 한국에 휴가를 오면 동생들은 출근하니까 집안 정리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동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두기도 한다. 그냥,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주어질 때 이왕이면 신경 써서 챙겨주고 싶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혼자서 머리를 감으려고 해도 손에 박혀있는 바늘 때문에 힘들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도 먼 나라 이야기이다.
주중에는 출근을 해도 주말에는 꼭 한 번씩 나를 보러 병원에 와줬다. 오기 전에 필요한 것은 없는지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미리 전화도 걸어준다. 그리고 병원에 와서는 머리도 감겨 주고, 자기 전에 나 혼자서 하는 일들을 모두 해 준다.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면 30분씩이나 걸릴 일들이 동생들은 5분 안에 뚝딱뚝딱해 낸다.
너무 많이 시키면 다음 주에 안 올까 봐서 나 혼자서 동생들이 오기 전에 이것저것 한다고 해도 미처 끝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자기야 이것 좀 해줘, 자기야 저것도 좀 해 줄 수 있어?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부탁을 해도 군말 없이 잘 들어주었다.
내가 늘 보살펴야 하는 존재라고 봐왔던 동생들이 이렇게나 훌쩍 자랐다니. 동생들이 떠나고 나서 병실에 홀로 앉아서 그 따뜻함에 일주일을 또 잘 쉬면서 보낼 수 있겠다 다짐을 했었다.
이제 병가의 반을 넘어섰다. 겨울이 어디 갔냐며 포근함에 가벼웠던 옷차림도 매서운 바람에 제법 두툼해졌다. 반대로 두툼하게 부어있던 내 발의 붓기 들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더불어 힘도 조금씩 더 들어가는 것을 보니 모두의 관심과 보살핌에 힘입어 잘 회복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가오는 1월에는 목발도 졸업하고 나 혼자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날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