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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Oct 21. 2019

'궁상이냐, 절약이냐' 자기검열에 상처받지마시길

절약, 그 낭만적 철학 - 씀씀이를 조롱하는 이들에게 반론을 던지다

이 옷. 예전 같았으면 벌써 버렸다. 2만원 채 하지 않는 아이 옷 한 벌일 뿐이었다.


이 옷에는 사소한 흠이 있어 사놓고도 입지를 못 했다. 옷에 붙은 택(Tag)이 문제였다. 이 원피스를 입을 때마다 아이는 목 뒤를 까끄러워 했다. 고작 택 때문에 엄살인가 싶어, 내 목에도 대어봤다. 택이 거칠어서 아이가 거슬려 할 만 했다. 아파하는데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짓고리를 꺼냈다. 얼룩이 져 버리려던 회색 내복 바지에서 아주 작은 네모 천조각을 잘랐다. 삐뚤빼뚤한 바느질이 티나면 아이가 창피해할까봐 원피스 겉면에 아주 짧게 바느질을 했다. 비루한 바느질 실력이나마 잘 써먹어봤다. 보드라운 천으로 택 부분을 덮어 옷 한 벌을 살렸다! 어찌나 흡족하던지, 실실대며 사진을 찍어댔다.


이젠 값 싼 아이 옷 한 벌 덥썩 버리지 못 하고, 미련이 남는다. 커피 세 잔 값, 외식 한 끼 값이면 다음날 택배로 우리집 문 앞까지 배달되어 있을만큼 싸고 편리한 옷이었다. 하지만 난 버릴 수 없었다.


이건 궁상일까, 절약일까?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기로 했다. 평범한 우리 살림살이들일 뿐인데 궁상인지, 절약인지 가늠해야 하는 사회의 시선 자체가 몹시 잔인하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돈 씀씀이가 조롱거리가 되는 분위기에 반론을 던진다.


빈곤을 처벌로 여기는 사회


어느새 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빈곤을 일종의 '처벌'로 여기기 시작했다. 가진 재산이 부족하니, 남들보다 덜 행복하겠다는 편견을 넘어, 이젠 노력 부족에 대한 응당한 대가로 생각한다는게 문제다. 공부를 덜 해서, 성실하게 일 하지 않아서, 당신을 키운 부모가 양질의 육아를 하지 않아서.


편견은 다시 편견으로 거듭난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원래 불우했고, 앞으로도 불우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인식 -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계층 순환을 허용하지 않는 소득 상위 20%의 견고한 성은 그들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우러름 - < 20 vs 80의 사회>, 리처드 리브스 지음



젊어서는 돌도 씹는다던데 청년 흙밥은 앓는 소리이며, 좀 더 분발하라는 지적. - <청년 흙밥 보고서>, 변진경 지음



특성화고 아이들은 자주 주눅이 든다. 고등학생 생태계에서 가장 낮은 서열이라고 사회가 매겨 놓은 탓이다. 아이의 낮은 성적과 부모의 가난한 형편은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이어졌다. 


베테랑 직원 중 아무도 고장난 기계에 들어가지 않는데, 갈비뼈 골절로 치료 중이던 (故)이민호 군은 생수 컨베이어 벨트와 적재 기계 사이로 들어간다. 심지어 치료중이라 휴가 낸 고등학생 아이를 구태여 불러 기계를 고치도록 했다. 특성화고 아이들은 이게 부당한 상황인 줄도 몰랐다. 자기를 지킬 힘이 없었다. 민호는 그날 뇌사 상태에 빠졌고, 일주일을 버티다 부모 곁을 떠났다.


물건과 재산으로 사람을 증명하는 평범한 일상이 누적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차별로 돌아온다. 사람을 온전한 개인으로서 판단하지 못 하고, '특성화고 출신', '인문계 출신', '소득 하위 20%', '소득 상위 20%'로 나누어 쳐다보게 되는거다. 그 폭력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가난하니까, 힘 없으니까 응당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성적과 재산으로 사람을 이분하는 잔인한 셈법에도 논리가 있다. 바로 '노력한만큼 대가가 따른다'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실이 아님을 속속들히 밝혀지고 있다.


공부 실력, 그리고 재산은 개인의 노력 100%가 아니다. 계층 대물림이 분명히 있다. <20 vs 80의 사회>의 저자, 리처드 리브스는 계층 대물림의 원인을 중상류층의 기회사재기에서 찾았다. 가난한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 하는 건 노력 부족이 아닌, 중상류층의 반경쟁적인 기회 사재기 때문이라는 거다. 어쩌면 원인이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있는건 아닐 수도 있는데, 사회는 너무나 쉽게 그 아이들을 '우리'에서 배제했다.


궁상이냐, 절약이냐. 자기검열은 이제 그만


'빈곤은 개인의 누적된 행동에 대한 처벌이다'라는 왜곡된 인식이 연장되어 사람들은 궁상을 쉽게 조롱하고 깔본다. 계층이 고착화되어가는 사회에서 가진 재산이나 집안 환경만으로 사람 됨됨이를 판단될 수 없음에도, 적은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우리는 자기방어로서 소비를 한다. 번 돈을 진짜 좋아하는 데 쓰지 못 하고, 남의 시선에서 안전하기 위해 소비한다.


우리는 자기방어로서 소비를 한다. 가난한 집 아이로 비춰질까봐 육아용품에 꽤 신경을 썼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내 옷과 구두, 가방에 많이 공들였다.

3년 전, 어린이집에 아이를 처음 보낼 때, 아이에게 유명 브랜드 옷만 입혔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입던 편하지만 허름한 옷 때문에 아이가 낮춰 보일까봐, 가난한 집 아이로 비춰질까봐, 아이 차림새에 무척 신경을 썼다. 엄마가 되기 전, 미혼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옷과 구두, 가방에 신경을 많이 썼다.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입은 옷보다 지혜의 지평이나 선한 행동이 더 나은 삶을 결정해야 할텐데, 사람들은 내 아이가 무엇을 입었는지, 내가 어디에 살고 무슨 차를 타는지, 어떤 직장에 다니고, 가진 돈은 얼마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이건 궁상이다', '이건 절약이다'라고 이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작은 실천으로서, '있어빌리티'보다 절약을 자랑하기로 했다. 까끌거리는 아이 옷의 택을 떼어, 바느질로 기워 입는게 보통의 삶이란걸 자꾸자꾸 떠들고 싶었다. 


동시에 내가 가진 물건이나 소비 습관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나를 설명하면서 멋지게 살고 싶다. 주말 나들이에 외식 하지 않기 위해 식빵에 잼을 들고 다니는 (궁상처럼 보이는) 일상과, 책과 글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삶을 나란하게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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