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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pr 15. 2022

남성 페미니스트 동료들과 함께 책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어져 있다> 

"페미니스트는 정형화된 존재가 아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 역시 단일한 존재가 아니고 서로 생각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비장애인-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이자 진보 매체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비교적 안정되게 지지자를 획득할 수 있었던 나의 페미니즘이 남성 페미니스트 서사로 도드라지는 걸 경계한다."

"페미니스트의 '자격'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위해선 '앎'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성중심 사회에 길들여졌고 가부장제가 심어 놓은 관습들을 너무나 편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됐다'며 방심해서는 안 된다. 페미니스트로서의 말이나 행동을 계속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남자라서 미안해요"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자신도, 세상도 바꾸지 못한다."

"여성을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안티 페미니즘은 모두를 하향 평준화시키면서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남성을 위한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반면 페미니즘은 불필요하고 불행의 씨앗이 되는, '권력'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짐'에 가까운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남성에 요구한다. 가부장제에서 진리나 규범처럼 여겨 온 것이 사실은 여성과 남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향평준화를 지향한다."



남성 페미니스트 동료들과 함께 책을 냈습니다. 


지난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진행하는 '온라인 평등밥상'에서 이대남 프레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20대 남성은 이렇고, 20대 여성은 저렇고' 식의 말을 한참 떠들다가 문득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말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남성과 여성의 성향 내지는 정체성을 쉽게 규정하는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요? 분명 의도는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젠더'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대남 프레임을 깨는데 집중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특정한 여성성과 남성성만을 과잉대표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저는 '남성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남성의 모습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온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명 '모범적 남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은연중에 규정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남성'이라는 존재는 나를 기준으로 이미지화된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의 비장애인 남성일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갖고 있는 '정상성'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을 일종의 '특권 포기' 내지는 '도덕적 책무'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습니다.


사실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던 초반에는 제 위치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사실을 계속 상기하는 것조차도 조금은 버거웠습니다. 이런저런 후회와 죄책감 등등이 결합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남성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여성을 위하거나 대변하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꽤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됐습니다. 어떤 정치적 이슈나 사건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지난한 일상적 문제들과 부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싸우거나 타협할 수 있는 체계를 페미니즘이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을 하지 마라"는 말로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고요. 이 곤란함을 해소하는 것은 오래된 저의 숙제였습니다.


다행히 와온 출판사의 하늘 대표님의 제안으로 안희제, 이솔, 신필규, 이한님과 같은 남성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공저 <우리는 이어져 있다>를 쓰면서 '남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논의를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공저자인 네 분은 조금 더 넓은 층위에서, 그리고 보다 섬세하게 '자신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제가 간과하거나 혹은 단순화했던 부분들, 설명하기 어려워서 일부러 넘어간 부분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삶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냈습니다.


안희제님은 '질병'을 통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자신의 집에서 돌봄의 배분과 가족관계의 형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주목합니다. 나아가 할머니·할아버지 간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까지 이어지는 데서 벌어지는 개인들의 '균열내기'를 잘 포착해냅니다.


이솔님은 가정, 학교, 군대 등에서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을 서술하고 이를 탁월하게 해석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절망을 바라보고, 괴로움으로부터 달아나길 거부하는 ' 정직한 절망'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해방적 언어'였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그 언어는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고, 동시에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경청하며 마음을 '이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필규님은 페미니즘이 '내가 아무런 오명을 쓰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최초의 자리를 만들어준 이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 단체의 '남성' 회원으로서 그는 '차이'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간극이 아닌 '다양성의 원천이자 사유의 자원'이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며 군형법 92조 6 폐지운동의 예를 듭니다.


이한님은 페미니즘을 '폭주하는 남성성 열차에서 탈출하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남성연대에서의 생존법을 열심히 익히던 사람이었지만, 어느새 친구들로 인해서 '함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페미니즘을 익히게 됩니다. 페미니즘을 통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습니다. 다만 조금 더 넓고 다양한 감정과 관계에 대해 도전해볼 수 있게 되는 계기를 페미니즘이 만든다는 사실을 그의 글이 알려줍니다.


네 분이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깊이 있고 호소력 있게 풀어주신 반면에 제 글은 딱딱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이상한 위치에 대한 고민, 또는 '조신한 남페미'론이나 '스윗' 혹은 '무해'에 가까운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을 반박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원고를 쓸 당시에 저는 두 권의 책을 통해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할 말을 거의 다 하지 않았겠냐는, 약간의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습니다. 겨우겨우 쓴 글들의 퀄리티는 아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까지 쓴 글 중에 가장 솔직한 마음을 담아 쓴 것은 분명하니,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는, 그리고 저의 수많은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필자들과 같이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기쁜일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보고 함께 생각을 나누게 된다면, 연대는 더욱 단단해지고 버틸 수 있는 힘은 더욱 커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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