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왜 내 통장은?
"예전에는 영어를 잘하거나, 일찍 승진하거나, MBA를 간다거나 하면 대단하다 생각했다.
요즘엔 그래 봤자 서울에 아파트 없으면 무슨 의미인가 싶다."
최근 블라인드에서 본 글이다. 공감과 댓글이 수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다른 회사에 다니는 내게도 이 글이 떴겠는가. 글쓴이의 소속은 모 자동차 그룹이었다. 훌륭한 스펙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고, 연봉도 높다는 그곳 말이다. 그런 곳에 다니는 이마저 저런 말을 하다니. 근로소득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진 모양새다. 코로나 이후 잇따른 자산 폭등에 따른 현상 이리라. 스펙을 열심히 쌓아 높은 초봉을 받으면 뭐하나. 수도권 아파트 값 앞에서 무력해지기 일쑤이지 않는가.
자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져만 간다. 유튜브를 보자. 돈 버는 법이 즐비하다. 근로소득에 대한 얘기는 없다. 부동산, 주식, 코인 얘기로 가득하다. 몇몇은 지금이 단군이래 돈 벌기 가장 쉬운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내 통장은 왜 이 모양인 건지. 종잣돈이 있어야 투자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알고리즘은 2차 공격을 개시한다. 스크롤을 내려보자. 무자본 창업 성공 사례가 튀어나온다. 자신만의 지식을 기반으로 SNS를 활용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군. 다만 내게 돈까지 받으며 알려줄 지식이 없다는 게 문제다. 잠시만, 그럼 나는 돈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는 건가. 매달 빠져나가는 청약 통장은 무슨 의미이었을까. 그간 마주쳐 온 무수한 OMR 카드들은 무엇이었을까. 무기력감이 치솟는다.
블라인드를 더 뒤져봤다. 이번엔 연봉 인상률이 화두였다. 작성자는 원자재 산업 종사자이었다. 그간 연봉이 오르지 않았던 건 이해한단다. 원자재 시황이 장기 하락세를 그려왔기 때문이다. 다만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도래한 지금은 무엇이냐는 원성이 이어졌다. 어려울 때 임금을 동결했다면, 호황을 맞은 지금은 그에 걸맞은 인상이 되어야 하지 않냐는 말이었다. 공감이 쏟아졌다. 한없이 스크롤을 내려봤다. 댓글 하나에 멈춰 섰다. "대기업, 중견은 인상 여지라도 있죠. 중소는 토로할 곳도 없습니다." 씁쓸했다. 근로 노동자 대부분이 중소기업에 소속된 현실을 고려해보니 더욱 그러했다.
짠내 나는 연봉의 속사정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이다. 주주란 회사가 발행한 주식을 보유한 자연인, 법인을 일컫는다. 즉 주식 매입을 통해 회사에 출자한 주인이다. 그렇기에 회사 이윤 분배 최우선 대상은 주주가 된다. 만약 주식을 발행하지 않은 회사라면? 마찬가지로 자금을 댄 집단 혹은 개인이 이윤 분배에 절대적 의사결정권을 갖게 된다. 그래서일까. 근로자 봉급은 쉽게 인상되기 어렵다. 이윤은 우선 주주(출자인)에게 분배되기에, 근로자는 후순위이기 때문이다. 어째 일은 근로자가 하지만, 수익은 주인이 가져가는 모양새다.
역시 자본주의는 비정한 제도인 걸까. 속단하긴 이르다. 주주의 출자는 자산을 Risk에 노출 시킴을 의미한다. 보장되지 않는 미래 수익에 베팅하는 것이다. 근로자의 봉급은 다르다. 근로 계약을 통해 일정 수익이 보장된다. 여기서 'High Risk, High Return' 공식이 적용된다. 불확실성에 베팅한 사주들은 이윤을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아울러 이윤이 모두 주주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주주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이윤을 재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기적으론 근로자 몫을 감소시킬지 모른다. 그러나 재투자를 통해 회사 이윤이 늘어난다면, 향후 근로자 몫 역시 상승될 여지가 있다. 사주의 방향성 설정에 따라 근로자의 경제 사정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자본주의는 합리적이기만 한 걸까. 확언은 어렵다. 부도 직전 돈을 챙겨 도주한 사장의 모습이 뉴스에 나온다. 실화 기반 영화에선 별로 되지 않는 이윤을 독식하는 사주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럼 회사 주인이 윤리적이기만 하다면, 자본주의는 합리적이기만 한 걸까? 아직 미지수다. 주식은 증여가 가능하다. 소규모 사업체라면 '패밀리 비즈니스' 체제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주'라는 권리가 대를 이어 내려간다는 의미다. 여기엔 별도 Risk Taking 과정이 없다. 그럼에도 엄연한 '주인'의 권리를 얻게 된다. 회사 이윤 분배에 있어 우위를 점한다. 수저 등급 탄생의 순간이다. 주식만이 아니다. 각종 자산은 모두 증여가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가 부동산이다. 그 와중 누군가는 부채만 증여받는다. 안타깝게도 부채 역시 자산이기 때문이다. 수저 간 색깔의 차이가 점점 선명해져 간다.
증여만 봉쇄하면 만사 해결인 건가. 이는 자본주의의 근간인 개인 이윤 추구 행위를 박살 낼 우려가 있다. 우리 바로 위 김가네 왕국이 대표적 사례다. 대신 우리 사회는 증여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택했다. 증여 자산 일부를 재분배해 기회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양극화 심화는 엄연히 현재 진행형이다. 취준생들은 오늘도 처음 들어 보는 회사에 자소서를 들이 민다. 그 와중 몇몇 또래들은 아버지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신문을 보면 부동산에 신음하는 2030 세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와중 청담동 모 빌딩의 주인은 7세 도련님이란다. 어째 일은 근로자가 하되, 이익은 주인이 차지한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인류 문명은 농업을 통한 생산력 향상으로, 보유한 잉여 생산물 규모에 따라 계급이 나뉘며 탄생했다. 상위 계급은 자산을 유지해야 했다. 통치 이데올로기가 태어났다. 국가 체제가 주도해 주종 관계를 설정했다. 수저는 무슨, 민증 색부터가 달랐다. 양극화 정도가 아니었다. 양극단 그 자체였다. 낮은 계급이 높은 계층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했다. 노동의 대가는 주인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주인이 넓은 아량을 지녔길 바라야 할 뿐이었다. 자칫 했다간 매질 외에는 별다른 보상은 없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인류는 그랬다(지금도 그런 나라는 있을 게다). 이후 민주주의가 탄생하며, 근로자의 권리는 한층 향상되어왔다. 다만 자산의 대물림 속성은 유지되었다. 그렇기에 양극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어쩌면 인류 문명은 태생적으로 주인이 더 많이 갖는 속성을 지닌 듯하다.
논밭에서 변기까지
주인이 많이 갖는 게 인간 세상의 논리이었다니. 이번 생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단군이래 돈 벌기 가장 쉽다'는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오랜 기간 인류에게 자산이란 농산물, 가축, 일부 가내 생산품, 교역품 등이 전부였다('노예'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도 누군가에겐 자산이었다). 생산 수단이 땅, 농기계, 수공업 기구 등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기 위해선 전쟁을 하거나, 실크로드로 나선 낙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교역량이 폭증했다. 산업혁명 마저 도래했다. 생산량이 치솟았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생산 수단이 생겨났다. 대형 선박, 기차, 공장 등이 그 예다. 개인을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자산의 생산 수단이 늘어난 것이다.
생산 수단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자 했다. 투자 러시가 도래했다. 회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투자를 늘려 갔다. 국가는 채권 발행을 통해 각종 산업을 서포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돈은 부족했다. 주식이란 신박한 자금 조달 방법이 고안되었다. 주식은 본래 대항해 시절, 네덜란드 선주들이 투자자에게 돈을 모아 수익을 나눠주겠다는 증빙을 발행하며 태어났다. 국가는 이를 공인화 시켜 증권거래소를 세웠다. 이제 개인은 회사를 설립하거나 물려받지 않아도 한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투자한 만큼 회사 운영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후 종류도 다양화되었다. 각종 펀드와 ETF가 탄생했다. 적은 돈으로도 여러 회사에 투자하고 싶은 니즈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도시에 사람이 몰렸다. 살 곳도 일할 곳도 부족해졌다. 건축기술은 내가 아래층 사람 머리 위에서 볼일을 봐도 그가 알아채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다. 건물의 높이가 갈수록 높아졌다. 사람들은 지표면만이 아닌 공중에 마련된 공간마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부동산 러시의 서막이 열린 순간이었다. 이후 부동산 투자 방식 역시 다양해졌다. 리츠가 한 예다. 리츠란 '부동산 관련 자본·지분에 투자하여 발생한 수익을 투자자에게 배당하는 회사나 투자신탁'을 의미한다. 이제 개인은 리츠 회사의 주식을 매입해 건물주의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건물을 짓거나 물려받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끝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에 무려 5천만 원이 넘는 동전까지 나타났다. 그게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게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접근성이 좋은 자산은 손에 꼽았다. 논, 집, 가축 정도였다. 이제는 두 분께 설명드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산의 종류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 모든 걸 누구보다 편안한 자세로 살 수 있기까지 하다. 점심시간에 바지를 벗고 변기 위에 앉아서.
이쯤 되니 원성이 들려오는 기분이다. '종류가 늘어나면 뭐하나, 돈이 있어야 사든 말든 하지!' 맞는 말이다. 다만 우리에겐 또 다른 기회가 생겨났다. 바로 온라인 네트워크다. IT기술은 코인과 MTS만 만든 게 아니다. 각종 전자 상거래를 가능케 했다. 덕분에 보다 쉽게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을 짓거나 복잡한 유통 계약을 맺지 않아도 된다. 웹사이트 개설마저 옛말이다. 소셜커머스 플랫폼에 공급자로 가입하면 그만이다. 또한 IT업계는 소셜미디어도 탄생시켰다. 덕분에 개인은 금전적 베팅을 하지 않아도 수익 창출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 일상이나 지식을 콘텐츠화 해, 대중의 관심을 끌면 그만이다. 그게 곧 상품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 개인은 보유 가능 자산 종류의 증가, 온라인 창업, 개인 콘텐츠 상품화가 가능한 세상을 맞이했다. 지금이 단군이래 돈 벌기 가장 쉬운 시대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잠시만. 자산의 주인이 되거나 제품, 콘텐츠 공급자가 되면 그만인 걸까? 그러면 왜 3년 내 망하는 소규모 사업체가 90%가 넘는 건가. 왜 개미들은 오늘도 파란피만 철철 흘리고 있는가. 왜 신생 유튜버 대부분의 구독자 수는 세 자릿수를 못 넘기는 걸까. 사실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자산의 종류가 늘어났더라도, 사업의 루트가 다양해졌다고 해도, 그러하다. 규모의 경제라는 벽이 있기 때문이다. 똑똑한 개미일지라도 기관투자자가 만들어 내는 흐름 앞에선 쓸려 다니기 십상이다. 기발한 유튜버이더라도 전문 PD 군단을 꾸린 제작사 채널을 넘어서긴 힘들다. 마치 체급이 정해지 않은 링에서 타이슨 형님을 만난 형국이다.
기회가 다양해진 지금, 개인에게는 여느 때보다도 자신에게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하락장에 물을 탈 돈도, 유튜브나 브런치에 올릴 콘텐츠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참고 가능한 사례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맞는 전략의 방향성과 상세 내역은 무엇일까. 정말 있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