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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Jan 21. 2022

세상에서 색이 사라졌다

안은 까맣고, 밖은 하얗다


강남역 3번출구를 나서면 골목으로 들어가는 언덕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나면 카페가 보이는데, 이 카페는 조금 특이하다. 인테리어가 말 그대로 '올 블랙'이다. 바닥과 테이블 그리고 쇼파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새까맣다. 처음 갔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두 번째 방문하는 날에는 새까만 세상이 어쩐지 신경쓰였다. 


그 날은 강남에 저녁 일정이 있던터라 미리 서울에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별 생각 없이 '새까만 카페'로 가서 아이패드와 무선 키보드를 꺼내들었다. 쌉싸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생산적인 멍을 때리다보니 창 밖에서 춤을 추는 보송한 눈송이가 보였다. 눈송이 하나를 눈으로 따라가보면 눈의 춤이 만드는 우아함을 느낄 수 있다.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았기에 우산은 없었고, 커피를 홀짝이며 이따가 그치겠지라는 근거없는 생각을 하며 평화롭게 눈발을 감상했다.


점점 사선으로 떨어지는 눈발에 집중하던 시야가 문득 넓어지고, 새까만 카페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카페이었을 풍경이 창가에 앉은 여러 커플들로 인해 다르게 보였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커플 넷 모두 옷의 80%가 검정색이었다. 특히 나를 기준으로 2시 방향에 앉은 커플 중 남자는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모자, 머리, 코트, 니트, 블랙진, 블랙 구두까지. 새까만 카페에 앉아있는 새까만 남자. 머릿속에서는 까마귀가 사람처럼 앉아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재미난 상상이 떠올랐다. 창 밖의 새하얀 눈이 아니었다면 그는 얼굴만 떠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안은 검정색으로 칠해졌고, 바깥은 하얀색으로 물든 풍경은 어쩐지 기묘하게 느껴졌다.


'블랙'은 왠지 모르게 인싸들이 쿨한 멋짐을 뽐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블랙은 쿨하고 섹시하기도 하지만, 비밀이 많은 색이 아닐까. 깊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비밀스러움을 머금고 있는 입술과 어울린다. 같은 '올 블랙'이어도 다르다. 누군가에겐 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일수도, 누군가에겐 꾸안꾸와 같은 욕망의 경계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 블랙은 미니멀한 요즘 감성과 유채색 뒤에 숨지 않겠다는 자신감이지 않을까라는 요상한 생각까지 닿아버렸다. 어느덧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창밖을 보며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엉뚱한 생각은 펑하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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