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보통의 날들
이름을 짓는 일에 확신은 어디서 올까. 두 아이 때 모두 이름 짓는 일은 참 어려웠다. 이름을 짓고 불러주게 되면서 차츰 익숙해지고 제 이름 같다 싶어 졌을 뿐이다. 둘째의 이름을 지을 땐 마지막까지 두 개의 이름을 놓고 고민했었다. 지금의 이름은 소리가 좋고 포기한 다른 이름은 뜻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답은 갈렸다. 누구도 확신을 갖고 답해주지 못했는데, 단 한 명만 예외였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두 살이 되고, 태어난 지 27개월에 오빠가 된 아이. 세 살배기 오빠한테 “동생 이름 ‘승아’가 좋아, ‘ㅇㅇ’가 좋아?”라고 물으면, 확신 백 퍼센트 느낌으로 답이 돌아왔다. 어쩜 그렇게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호쾌하게 답을 내준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승아’라 부르는 소리가 참 좋았더랬다. 아이가 정확히 발음하기는 어려운 단어라서 그 이름은 ‘슝아’처럼 들렸다.
‘스’와 ‘시’ 사이......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굳어진 내 혀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기억 속에서만 완벽한, 사랑스러운 소리였다. 둘째의 이름에 대한 확신은 그렇게 왔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합리의 방식으로.
아기가 그때의 오빠만큼 자라 말을 하기 시작하자 자기를 ‘싱아’라고 불렀다.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것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넘어질 것 같은 걸음걸이, 짝발로 뛰는 듯한 달리기, 아슬아슬 불안한 가위질, 입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숟가락질.... 아이가 내뱉는 낱말들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였다. 싱아는 풀이름이었다. 작고 잔잔한 꽃을 피우는데 줄기는 데쳐서 먹거나 생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이 풀은 소설 속에서 어린 시절 좋았던 모든 것들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전혀 관계없던 것들을 우연으로 엮어가며 확신을 쌓아간다.
갑자기 이름 짓던 시절을 떠 올린 건, 얼마 전부터 아이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아이가 ‘승아’라고 말하던 순간의 서운함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몇 번을 물어봐도 ‘승아’라고 답하는데, “아직은 안 돼~~~”하는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이는 작아진 허물을 벗고 탈피하는 생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변신해 있곤 한다. 이제 영영 그렇게 커버리는 거니. 그냥 ‘싱아’라고 하면 안 될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지. 너를 계속 작은 고치 속에 붙잡아 둘 수는 없겠지. 나는 그저 너를 곁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인데...
타지에서 홀로 외로운 생활을 버텨나가는 아이들 아빠는 아쉬움과 걱정이 많다. 곁에 있다면 해줄 수 있는 것들,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죽 맘이 상할까. 아이들의 어떤 시간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도 다시 볼 수 없어 아쉬워지니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슬픔은 거의 고통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이빠 없는 우리의 생활도 더욱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는 일의 좋지 않은 점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다. 사랑을 주고받고 이해가 오가는 소통의 통로가 막혀버린 기분이다. 각자 홀로 애쓰다 보면 화도 나고 투정도 부리고 싶어 진다. 그런 이야기들을 카톡으로 나누다 보면 오해를 만들고 다툼으로 번지고 만다. 지나가버릴 사소한 감정은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작은 상처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점점 곪아서 우리를 안에서부터 갉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이산가족으로 지낸 지 4-5개월 만에 우리 가족은 어쨌든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코로나 19의 재확산 조짐과 치료조차 받기 어려운 그곳의 열악한 의료환경까지 감안한 결과였다. ‘경쟁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단 몇 달 앞도 예측이 안되고 계획을 세운다는 게 무의미할 만큼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린 어떻게든 삶을 살아 나가야 한다. 삶은 본래 예측이 불가능하고 계획에서 벗어난 경로로 나아가곤 하지 않던가.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의연함이 필요한 것 같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가야 할 아이가 두 나라를 오가는 사이 중요한 흐름을 놓치거나 방황하는 시간을 겪을 것은 뻔한 이치다. 그 정도의 굴곡이 아이의 삶을 망가뜨릴 리는 없다고, 그 시간을 통과하면 아이는 더 깊고 크게 자라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중요한 것은 엄마인 내가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 것이다. 내 감정 상태는 아이들에게 쉽게 번질 테니 말이다.
사라지는 상상을 했었다. 책으로, 침묵 속으로, 더 먼 곳으로, 아니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런 나를 작고 연약한 아이가 불러 세우곤 한다. 조그만 입술을 오므려 다정한 뽀뽀를 해주고 수십 번도 넘게 볼을 부벼댄다. 수시로 내 겨드랑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와 내 품에 안긴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혼을 내도 엄마는 좋은 사람이라고, 엄마가 너무 좋다고 말해주는 맹목적인 사랑에 목이 멘다. 그 사랑이 꺾이고 사라지고 싶던 나를 돌아오게 한다. 매일 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선 나는 나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게 어떤 바람이 있다면, 아이들이 엄마와 깔깔깔 소리 내어 웃던 순간들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밤마다 자려고 누워서 아이들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면 나는 목소리를 바꾸어 무슨 말인가를 한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고 같은 말을 열 번도 넘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게 그렇게 웃겨?” 나는 똑같은 걸 반복하기 싫지만 아이들이 웃는 게 좋아서 또 해 보인다. 그러면 아이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러다 자기 둘이서 마주 보고 또 웃는다. “엄마 진짜 웃겨!” 유머감각이라곤 1도 없는 나를 웃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어린이들. 언젠가 너희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멀고 먼 별빛 같은 순간일까를 생각하면 나는 웃다가도 그리움의 눈물이 고인다. 아름다워서 눈물 날 것 같은 순간들 속에 지금 우리가 있다.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겪는 것, 장애물을 만나는 것도 괜찮습니다. 삶에는 신비로운 면이 있고 불확실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반비)
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도 소중하지만, ‘행운의 마주침’, ‘우연한 일치’, ‘조화의 순간’처럼 예기치 못한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인생이 주는 선물이라고 믿는다. 우연함을 기꺼이 삶 속에 끌어안는다.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함 속에 숨어 있을, 우리가 발견해 낼 웃음과 애정의 틈 사이로 삶에 대한 확신은 깃들 것이다. 비합리한 방식으로 나타나 우리를 단단히 지탱해 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삶의 이야기를 우리는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