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이 지났다. 열 세 살의 그 아이는 나에게 책 한 권을 빌려줬었다. 달과 육펜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서 너 일쯤 지났을까, 빌린 책을 친구에게 다시 돌려주던 날, 우리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늘상 함께 걷던 하교길. 집 근처 놀이터 그네에 앉아 나름의 고충을 서로 나누었던 것 같다. 또래보다 성숙했던 그 아이가 대부분 이야기했고, 나는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며 평화로운 우정노선을 유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시작도 못했던 그 책을 다 읽은 사람 마냥 잘 읽었다는 인사와 함께 돌려줬었다. 책을 어떻게 봤냐는 그 아이의 질문에 순간 얼어붙었다. 멋적게 좋았다고 얼버무렸으나 친구는 재차 나는 이런이런 문장이 좋았어라고 말했다. 나도 그 문장이 좋았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아이와 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거짓말이 어려운 나이였다. 그 날 이후 달과 육펜스는 내 무의식 속에 작은 수치심으로 각인되었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달과 육펜스라는 제목을 어디에서라도 만날 때면 나이에 맞지 않았던 그 아이의 냉소적인 얼굴과 그 날의 텅 빈, 서늘한 놀이터가 떠올랐다. 28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내 손에 서머싯의 달과 육펜스가 들려있다. 동네 중고서점에 가서 5,300원을 주고 사면서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는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기분이었다. 책의 초반부는 당황스러웠다. 이야기의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열정인 그림을 위해 가족과 생계를 내버리고 떠났다는 사실과 그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과연 열 세 살 그 아이는 이 책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 책 속 문장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잊고 싶지 않아 줄을 긋고 접어둔 자리가 상당했다. 책을 읽다가 여러 번 멈춰서야만 했다. 과거의 이미지로 혹은 해묵은 감정으로 수많은 여행을 거듭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책을 읽었을 테니 책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할 것이다. 나의 불친절이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이 책을 읽게된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일테니 말이다. 나와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같은 나이, 마흔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펼쳐본다. 텅 빈 자리에서 나는 마흔인 동시에 열 세 살이기도 하여서 그녀가 어디서 무얼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서글퍼지지 않는다. 마흔 쯤이 되면 그리운 것들을 그저 그립게 두는 힘이 절로 생기기도 하거니와, 모든 아름다움은 필연적인 슬픔을 지니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만약 우리가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안에서 다시 만난다면, 압생트에 버금가는 독주를 한 잔에 나누어 마시고 달 아래 나란히 누워보고 싶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서로의 열정이 머무는 것들에 대해. 그것은 가족이어도, 그림이어도, 그 무엇이어도 좋을 일이다. 지금의 삶이 나름대로 평안하고 그런대로 아름답다고 서로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