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음을 내며 서킷 위로 머신이 달린다. 시속 300Km는 우습게 뛰어넘는 이 괴물은 미친 황소처럼 도로 위에서 포효한다.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이 쿵쾅쿵쾅 울리는 진동에 따라 레이서의 심장 박동수도 상승한다. 그러나 이성만은 차갑게 유지하자. 흥분해서 조작할 타이밍을 조금만 놓쳐도 머신은 안전 펜스를 향해 돌진하거나 서킷 밖으로 튕겨나갈 수도 있고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드라이버와 함께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영화 F1 더 무비'는 관객을 극한의 레이스로 초대한다. 메르세데스가 영화를 위해 제작한 레이싱 머신에 촬영 카메라를 설치했고, 배우들은 대역 없이 머신을 운전했다. 화면에 담긴 모든 장면이 실제였다. 맹렬히 회전하다가 급브레이크에 빨갛게 달아오른 바퀴, 미친 듯한 스피드로 충돌할 듯 덤벼들다가 부딪치기 직전에 빠져나가는 머신들, 레이싱 헬멧을 착용했음에도 격한 스피드가 만든 거센 바람에 일그러지는 배우들의 얼굴, 부딪쳐 나뒹굴고 서킷 밖으로 튕겨나가 처박혀 불타오르는 레이싱카, 그리고 그 모든 장면에 환호하고 경악하는 관객들까지. CG를 사용하지 않고 실물로 구현한 현실감은 러닝타임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내내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광포한 엔진음이 작열하는 머신 조정석에 앉아 미친듯한 속도감과 스릴을 즐기는 듯한 쾌감을 주었다. 영화 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담당한 사운드 트랙은 지금 당장 핸들을 잡고 도로 위를 질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왕년에 전설적인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대담한 레이스로 주목을 받았던 신예였지만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뒤 F1을 떠나야만 했던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그는 10년 동안 이혼과 도박 등 방황을 겪지만, 레이스에 대한 열망을 잊지 못하고 다시 르망 24, 나스카 등 F1이 아닌 다른 레이싱에 복귀하여 객원 드라이버로 활약한다. 그런 소니에게 오랜 동료였던 '루벤 세르반테스'(하이베르 바르뎀)가 찾아와 F1레이싱 복귀를 제안한다. 소니가 30년 만에 F1에 복귀하여 합류할 팀은 시즌 1과 2에 단 한 포인트도 따지 못해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는 APXGP. 마지막 남은 시즌에 1승이라도 거두지 못하면 팀이 매각되거나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스태프들의 사기는 바닥이었고 두 명의 주전 드라이버 중 한 명은 팀을 떠난 상황이다. 남은 드라이버인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도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기대를 받고 있지만 머신의 성능도, 팀원들의 실력도 다른 팀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APXGP 팀에서 기량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레이스 결과는 저조한데 팀 해체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조슈아 또한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이미 다른 팀들은 주전 드라이버들이 다 차 있는 상황이라 이대로 F1에서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영화는 전형적인 언더독 신화의 스토리를 따라간다. 머신의 성능도 팀원들의 기량도 최약체인 APXGP팀. 실력 있는 베테랑 드라이버로서 30년 만에 F1으로 복귀하지만 퇴물 취급받는 소니 헤이스. 슈퍼 루키로 촉망받는 기대주이지만 언제든 퇴출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시달리는 죠수아 피어스. 이렇게 우승과는 거리가 먼 이 언더독들이 좌충우돌을 겪으며 우승을 거머쥐는 이야기. 그렇지만 진부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감독 조셉 코신스키는 전작 '탑건 : 메버릭'에서 보여주었듯이 상처와 치유, 갈등과 화해, 성장과 좌절, 극복과 승리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구성하고, 이를 전형적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영리하게 표현했다.
브래드피트가 연기하는 소니 헤이즈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전형적으로' 섹시하다. 나이도 많은데 마초적이면서 반항기가 가득하다. 팀에 들어와 처음 치르는 F1 경기에서 동료이자 신예인 조슈아에게 순위를 양보하라는 팀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신의 순위를 지키려 고집을 부리다 기어이 죠슈아의 차를 들이받고 함께 리타이어 된다. 독단적이고 무모한 스타일을 고수하여 팀원들과 관중들의 불신을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도박과 같이 과감하고 위험한 레이싱을 통해 점차 팀의 순위를 높여간다. 레이싱 룰의 회색지대를 교묘히 이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정석적인 레이스를 펼쳐서 팀원들과 관객들의 인정을 얻어낸다. 겉으로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하지만 홀로 있을 때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엄습하는 불안에 잠을 깨기도 한다. 위험한 레이싱 전략에 조슈아가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레이싱 전에 부적처럼 소지했던 트럼프 카드를 잊어버리고 경기에 임했을 때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광기 어린 질주를 하다가 사고를 내기도 한다. 과거에 겪었던 큰 사고로 인해 입은 정신적 트라우마와 육체적 고통을 감추고, 내면의 불안과 의심을 이겨내며, 무모하리만큼 대담하게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며 순전한 레이싱에의 몰입을 추구하는 반항적인 레이서. 심지어 잘생겼고 중후하다. 이러니 콧대 높고 자부심이 강한 여성기술총괄 케이트 메케나(케리 콘던)가 흠뻑 반할 만도 하지.
죠수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를 보면 '탑건 : 매버릭'의 루스터(마일즈 텔러)가 오버랩되었다. '탑건 : 매버릭'에서 루스터가 매버릭에게 반항하고 들이받고 싸우지만, 결국 매버릭의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하고 가장 충직한 동료이자 제자로 변한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위축되고 소극적이 되었던 결점을 극복하고 성장한다. 조슈아 피어스도 영화 내내 사사건건 소니에게 반항적이다. 소니와 함께한 첫 기자회견에서 노인공경이라는 말로 소니를 조롱하고 레이스를 하는 내내 소니의 거칠고 도박적인 스타일에 거부감과 의심을 감추지 않는다. 소니의 공격적인 전략이 적중하여 죠슈아의 순위가 올라가면서 소니에 대한 신뢰도 높아지지만 자신의 자리를 소니가 뺏을까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고를 당한 뒤 복귀한 레이스에서 소니의 차를 들이받아 소니를 리타이어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점차 레이스에 대한 소니의 방식이 맞았음을 인정하게 되고, 소니가 과거에 당한 사고 영상을 찾아보며 그의 아픔을 헤아리기도 한다. 레이싱에 대한 열망만큼 SNS나 기자회견에서 얻는 인기, 파티에서 누리는 환호 등을 선호했던, 철부지 죠슈아가, 그 모든 게 소음이라는 소니의 말을 받아들여, 온전히 레이싱에 집중하는 레이서로 성장한다.
죠슈아와 함께 APXGP팀도 성장한다. 첫 레이스 장면에서 엉망진창이었던 피트인의 정비 팀은 경기가 지속될수록 완벽한 호흡으로 경기를 뒷받침하는 백업 팀으로 거듭났고, 사기가 바닥이었던 팀원들이 전략 회의에서 쏘니의 말 '플랜 C는 Combat' 맞서 싸우자는 말에, 함께 싸우자고 외치며 결의를 다지는, 전투력이 충만한 팀으로 성장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행운과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 소니는 불운의 사고로 승승장구하던 인생 경로에서 나가떨어졌고 친구 루벤스를 통해 불현듯 찾아온 기회를 붙잡고 F1에 복귀한다. 조슈아는 행운으로 부여받은 재능과 기회로 꿈꾸는 레이싱을 하지만 그 대가로 감당해야 할 사람들의 기대 평가 환호와 비난의 무게에 짓눌려 제 기량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불운과 행운이라는 변수로 가득한 삶을 헤쳐나가는 힘은 '레이싱'으로 상징되는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 소니도 조슈아도 레이싱에 대한 열정이 순수했다. 소니는 사고와 이혼으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은 뒤에 오직 레이싱에 경험하는 순수한 몰입만이 삶의 근본적인 동기이자 토대임을 알게 되었다. 조슈아는 레이싱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SNS, 언론, 기자회견, 파티장의 평판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에도 목맨다. 하지만 소니와 경쟁하고 말다툼하고 주먹다짐까지 가며 치열하게 달리면서 점차 사람들의 말, 인정, 평가는 소음일 뿐, 정말 집중해야 할 본질은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몰입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시행착오와 실수를 겪지만 점차 한 팀으로 성장하며 돕는 엔지니어 팀과 정비 팀원들이 있다. 소니와 조슈아가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데 여성 기술총괄팀장인 케이트의 도움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 안에서 소니와 조슈아는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결국 완전한 팀이 되어 서로의 승리를 돕는다. 조슈아는 소니의 도움으로 안정되게 F1을 계속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소니는 조슈아의 희생으로 그토록 갈망했던, 순수한 레이싱 몰입 경험과 우승을 하게 된다. 레이싱처럼 삶은 분명 예측불가능하며 불운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나와 함께 '삶'이라는 레이싱에 참여한 팀원의 성공을 위해 함께 힘껏 달리면, 분명 소니가 말했던 '나는 듯이 레이싱하는 경험', 즉 순전하게 삶에 몰입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우승 트로피, 인기, 명예, 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는가. 내 삶에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한 삶인가. 삶에 부차적인 것들에 덜 신경 쓰고 진정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불운도 행운도 내 레이싱을 망치지 못할 것이다.
영화 'F1 더 무비'는 분명 오락 영화이다. 조셉 콘신스키의 전작 '탑건 매버릭'의 스토리 구조와 인물들을 그대로 땅 위에 펼쳐놓은 듯한 영화이기도 하다. '탑건 매버릭'에서 관객들이 직접 기체에 탑승하는 기분을 선사하고자 실제 전투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배우들이 직접 전투기를 몰면서 연기한 전략도 그대로 차용하여 F1 머신에 구현했다. 영화가 관객에 주는 메시지도 전형적이다. 순수하게 열망하고 도전에 몰입하라. 그리고 팀원들과 함께 성장하라. 그동안 수많은 스포츠 영화에서 표현했던 전형적인 메시지. 변주되어서 반복되었던, 어쩌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 하지만 'F1 더 무비'는 그 진부한 메시지를 산뜻하고 스릴 넘치는 영상과 환상적인 음악, 군더더기 없이 꽉 찬 스토리로 아주 맛있게 요리해 주었다. 할리우드 자본의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유능한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탑급 배우들의 열정을 담아서. 그러니 별 수 있나. 그 속에 흠뻑 젖어들 수밖에. 그런 면에서 참으로 우수한 오락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