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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를 버티시는 분들께

신경림 <갈대>,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존 윌리엄스 <스토너>

by 통나무집

누구나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수험생은 입시지옥을, 취준생은 취업전쟁을 치릅니다. 겨우 들어간 직장은 또 다른 전쟁터이네요. 상사에게 시달리고 후임에게 치이며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팁니다. 어쩌다 평탄한 하루를 보내도 누군가의 날카로운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 순간 마음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자영업을 시작하니 매출은 버티기에 간당간당한데 손님들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을까요.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자녀들은 왜 그렇게 속을 썩이는지요.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는 부모님에게 들어가는 병원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소득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데 전월세, 물가, 자녀양육비, 부모 봉양비용은 미친 듯이 치솟습니다. 마흔 중후반을 넘어서면 건강도 예전 같지 않지요. 조금만 무리해도 쉽게 피곤해지고 점점 잔병치레가 잦아집니다. 나이가 들면서 책임과 의무는 가중되는데 삶의 입지는 급속도로 줄어듭니다.

삶의 모양새는 달라도 모두들 고된 세상살이를 버티며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삶의 무게를 버티려 애쓰시는 분들께 꼭 필요한 것은,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지만 속은 남모를 고뇌와 슬픔으로 곪아가고 있으니까요. 내면에 가득 찬 아픔을 달래려 연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노래방을 찾아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기도 하시지요. 곡조와 가사가 슬픈 노래를 즐겨 듣게 되는 까닭도 그 노래가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인 슬픔과 공명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살이에 지친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와 힘을 드리고 싶어, 시 두 편과 소설 한 편을 소개합니다. 신경림의 시 <갈대>, 안도현의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 그리고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입니다. 시는 슬프고 아프고 서러운... 어둡고 차가워서, 손도 대기 싫은 마음을 어루만지며 달래주거든요. 시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잔뜩 무거워졌던 마음이, 마치 술을 한 잔 한 잔 마실 때처럼 훌훌 가벼워지기도 합니다. 소설은 드라마처럼 내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내가 아프고 힘들었던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삶의 무게를 버틸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저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 날이 있지 않나요? 차디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닌데 온몸이 떨리도록 한기가 느껴지는 날 말입니다. 일터에서 만난 진상 고객, 사춘기 자녀의 방황, 갑작스러운 질병....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맞닥뜨리면 거센 바람에 휘말린 듯 온몸이 후들후들 떨립니다. 혹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듯 평탄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 직장에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만약 퇴직하게 되면 어떻게 가족을 부양하지? 도대체 내 집은 언제 마련하지? 나는 노후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데 어찌 하나? 내가 산 주식은 온통 하락세이구나.... 온갖 고민에 시달리다 텅 비어버린 마음은 아름다운 달빛을 보아도 그저 무심하기만 하지요. 삶이 이다지도 초라하고 무료한 것이었나요. 내면에 응어리진 울음을 감추고 애써 괜찮은 척 살아가지만, 울어지지 않은 울음은 점점 비대해지고 무거워집니다. 묵직한 울음을 껴안은 몸이 부들부들 흔들립니다. 그렇게 요동치는 몸을 가누며 하루를,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


신경림의 시 <갈대>는 삶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렇지요. 삶은 누구에게나 서글프고 눈물겨운 것이지요. 잠시 즐겁고 행복한 순간도 맞이하지만 본시 삶은 힘겨운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이 넘실거리는 바다라고 했던가요. '인생은 고해이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무게를 과장하거나 축소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언어가 참 미덥습니다. 어설프게 희망을 말하기보다 삶이란 본래 고단하고 힘든 것이라고 덤덤히 알려주니 삶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생깁니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이며 산다는 것은 '조용히 울고 있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입니다. <스토너>는 1965년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입니다. 출간 당시에는 문단이나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1994년에 작가가 타계하고, 출간된 지 50년이 흘렀을 때 이 소설은 전 세계의 독자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고 2025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소설 <스토너>가 이토록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유는, 이 소설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우직하게 버티며 끝까지 살아내는 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보여주는 스토너의 인생은 고해(苦海) 그 자체입니다. 그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온갖 고통들로 점철된 삶을 살았어요. 어릴 때는 가난한 농군이었던 부모와 함께 열여덟 살까지 척박한 땅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고요. 부모의 헌신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가 영문학에 깊이 매료되어서 주경야독을 하며 고생한 끝에 영문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더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디스라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이디스는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는 여성이었어요. 결혼 생활 내내 이디스는 스토너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때로는 은밀하게 때론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딸 그레이스가 태어난 이후에는 살림과 육아를 내팽개치다시피 했습니다. 스토너는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밤에는 살림과 육아를 해야 하는 고된 생활을 계속해야 했죠.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면서도 스토너는 학교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가정에서는 딸 그레이스를 자상히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찰스 워커라는 학생의 박사 과정 심사에 관한 문제로 학과장 로맥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버렸어요. 결국 스토너는 직장에서는 학과장 로맥스로부터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아내 이디스가 부리는 갖가지 횡포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스토너가 느끼는 고통을, 작가 존 윌리엄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스토너 p251)


고통이라도 느껴서 활기를 되찾고 싶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말이 참 먹먹하지 않나요. 존 윌리엄스가 건조하고 담백한 문체로 그려내는 스토너의 고통이 어찌나 절절한지, 책을 잠시 덮고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시지 않고서는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소설 <스토너>는 인생이란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바다임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스토너는 대학에 들어가도, 되고 싶은 교수가 되어도, 원하는 여자와 결혼을 해도, 아름다운 딸을 얻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해결되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이 사라질 즈음에 다른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국 새로운 고통을 느껴서라도 지금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신음하듯 고백하는 지경에 이르는 게 인생임을 소설 <스토너>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고통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그런 삶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요? 그 해답도 소설 <스토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 불행한 결혼 생활, 지옥 같은 직장 생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그리고 말년의 암 투병까지,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스토너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삶의 여러 국면에서 맞이한 고통들을 끝까지 버텨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가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스토너는 평범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일 뿐입니다.


윌리업 스토너는 1910년, 열하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 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스토너 p8 ~9)


소설은 첫 장에서 스토너가 평범한 사람임을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생전에 조교수 이상 올라서지 못했고 동료들에게 특별히 높은 평가도 받지 못했으며 사후에 그를 기억하는 학생도 거의 없었던 사람.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었던 스토너가 온갖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스토너는 뜨겁게 '사랑'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삶에서 마주하는 어떠한 어려움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스토너가 사랑한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영문학, 딸 그레이스, 그리고 캐서린.


그는 대학 도서관의 서가들 속에서 수천 권의 책들 사이로 돌아다니며 가죽, 천, 종이로 된 책들의 퀴퀴한 냄새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마치 이국적인 향 냄새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책을 한 권 꺼내서 커다란 손에 잠시 들고 있었다. 아직 낯선 책등과 표지의 느낌, 그의 손길에 전혀 반항하지 않는 종이의 느낌에 손이 찌릿찌릿했다. 그러고는 책을 뒤적이며 여기저기에서 한 문단씩 읽어보았다. 책장을 넘기는 뻣뻣한 손가락은 이토록 수고스럽게 펼친 책을 서투르게 다루다가 찢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듯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 생전 처음으로 그는 고독을 느꼈다.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 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트리스탄과 아름다운 이졸데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연인들. 형수와 시동생 사이로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였다. -옮긴이)가 강렬한 어둠 속에서 빙빙 돌았다. 헬레네와 총명한 파리스는 자신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는 이런저런 강의를 함께 듣는 동료 학생들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을 그들에게서 느꼈다. (스토너 p25 ~ 26)


윌리엄 스토너가 처음 영문학과 깊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영문학에 관한 책을 만지기만 해도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진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환상을 보는 듯 영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문학과의 사랑에 푹 빠진 스토너는 삶의 어떤 곤경 속에서도 영문학에 대한 연구와 집필 활동을 놓지 않습니다.


윌리엄은 여전히 딸을 돌보는 일을 대부분 맡고 있었다. 오후에 대학에서 퇴근해 돌아오면 그는 자신이 아이 방으로 바꿔놓은 2층 침실에서 그레이스를 데리고 내려와서 자신이 일하는 동안 서재에서 놀게 했다. 아이는 바닥에서 조용히 잘 놀았다. 혼자 노는 것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가끔 윌리엄이 말을 걸면 아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서히 기쁨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집에 들러 상담을 하거나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가라고 가끔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책상 옆에 놓아둔 작은 요리용 철판으로 차를 끓여주었다.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 그의 서재에 대해 말을 던지거나 딸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학생들을 보면 서투른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아내가 학생들을 맞으러 나오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그녀가 아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렇게 거듭 사과하는 것이 아내의 부재를 설명해 주기보다 오히려 강조한다는 사실을 그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자신의 침묵이 설명보다 덜 구차하기를 바랐다.
이디스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의 삶은 그가 원하던 모습과 거의 비슷했다. 그는 수업준비를 하거나 과제를 채점하거나 논문을 읽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 세월이 흐르면 자신도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첫 번째 저서에 대해 그는 조심스럽고 소박한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그것이 적절한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어떤 사람은 "단조롭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충분한 조사"를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 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스토너 p143 ~ 145)


스토너의 일상을 표현한 장면입니다. 스토너의 일상에는 그가 사랑하는 영문학, 그리고 딸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 캐서린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스토너는 영문학 강의를 준비하고 학생들의 영문학 과제를 채점하고, 영문학에 관한 논문을 읽으며 연구를 하고 글을 씁니다. 그런 일상을 살았기에 스토너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어떻게든 견뎌 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학과장 로맥스의 괴롭힘과 아내 이디스의 횡포가 극심해지면서, 스토너는 그토록 사랑했던 영문학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때 스토너 앞에 캐서린이 등장합니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 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 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오후에 그녀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고, 두 사람은 여름을 고대했다. (스토너 p272 ~ 273)


스토너와 캐서린이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점점 깊은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캐서린과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삭막하고 고독했던 스토너의 삶에 활기와 생명력이 넘칩니다. 영문학에 대한 열정도 회복하여 왕성하게 연구를 해나갑니다. 하지만 캐서린과의 사랑은 불륜이었기에, 결국 학과장 로맥스의 훼방에 굴복하여 스토너는 캐서린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캐서린이 떠난 후 몸도 마음도 무너져 내린 스토너를 구원한 것은 영문학을 향한 스토너의 사랑이었습니다. 스토너는 영문학에 대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치고 책을 집필하는 일상을 악착같이 살아내면서 캐서린을 잃어버린 슬픔을 서서히 극복해 낼 수 있었어요.

스토너는 영문학, 딸 그레이스, 캐서린을 사랑하는 힘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들을 죽는 그 순간까지 버텨냅니다. 이런 스토너의 모습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모든 분들은 저마다 무엇인가에 매료되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끝까지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고 또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상 손님들의 패악질을 버티며 꿋꿋이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학업과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며 공부하고 있는 수험생들. 집에서 자신만 바라보는 자식들을 번듯이 키워보고자 치열한 생존 전쟁을 펼치는 직장인들. 예술과의 사랑에 빠져 불안정한 삶을 견디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지망생들..... 헬조선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은 스토너처럼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오늘 하루를 버티고 계십니다. 이런 우리네 삶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습니다. 바로 안도현의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입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드는 이의 창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드는 창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안팎으로 밀려드는 한기로 오들오들 떨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긴 듯 서글프고 불안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열정을 부르는 꿈이 있기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에, 엄혹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나갑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삶의 고통을 버티며 베푸는 사랑 덕분에 불안과 염려로 잠 못 드는 이들이 위로를 얻고, 혹독한 세상살이에 깊고 붉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치유되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처럼 기꺼이 사랑을 나누는 분들 덕분에 춥고 어두운 세상살이도 버틸만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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