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요한 <오티움>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누입니다.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꺼내 듭니다. 쇼츠 영상, 웹툰을 잇달아 클릭하고 스크롤을 움직이며 뉴스를 검색합니다. 넷플릭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합니다. 잠시만 머리를 식히겠다고 스마트폰 화면을 켰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두세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점점 눈이 뻑뻑해지고 손목이 아파오네요.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내일의 출근을 위해 억지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습니다. 이상하네요. 분명 편안하게 누워서, 보고 싶은 영상들을 원 없이 보았는데 쉰 것 같지 않습니다. 몸은 찌뿌둥하고 마음은 왠지 허전합니다. 삶에 필요한 에너지가 그다지 회복되지 않은 기분입니다.
나무를 베는 데 여섯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처음 네 시간은 도끼를 가는 데 쓸 것이다.
- 에이브러햄 링컨
도끼의 날을 날카롭게 벼려야 나무를 잘 벨 수 있습니다. 잘 쉬어야 열심히 일할 수 있지요. 궁금합니다. 어떻게 쉬어야 몸도 마음도 잘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정신과의사 문요한의 책 <오티움>입니다.
많은 현대인의 비극은 여가 시간의 부족에 있는 게 아니라 여가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보상 때문에 무언가를 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이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일 이외의 시간이 주어지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이내 부자연스러워지고 무질서해진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싫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정년퇴직 이후 한동안 활기를 잃어버린다.
(오티움 p30)
문요한은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을 때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유 시간에 즐겁게 놀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싫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하네요.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요.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쌍둥이를 돌보면서 한창 정신없이 살고 있었을 때, 일과 육아로 점점 시들시들해지는 저를 불쌍히 여긴 아내가 하루 동안 휴가를 준 적이 있어요. 장모님과 함께 아이를 돌볼 테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껏 놀다 오라는 겁니다. 너무 신이 났어요.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막막해졌습니다. 뭐 하고 놀지? 무엇을 해야 재미있을까?..... 핸드폰으로 보고 싶었던 영상이나 마음껏 볼까. 아니야 스마트폰으로 노는 것은 잠깐 즐길 때나 즐겁지, 모처럼 하루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너무 아까워. 이 나이에 오락실이나 pc방을 가기는 부끄럽고.... 술은 좋아하지도 않고, 설령 술을 즐긴다고 해도 이 시간에 부를 친구도 없고... 영화관에라도 가볼까나... 상영작들을 검색해 보니 볼만한 영화가 없네... 오랜만에 게임을 다운받아 해볼까나... 아니 요즘 게임들은 화면이 왜 이렇게 어지러운 거야. 조작법은 뭐 이리 복잡해... 결국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컴퓨터를 끕니다.
웹툰, 게임, 드라마나 영화 보기... 시작할 때는 참 재미있는 놀거리들이었는데 조금만 오래 지속해 보면 별로 재미가 없어져요. 몇 번 해 보다가 그만 두기를 반복합니다. 혹은 유튜브 쇼츠 영상처럼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콘텐츠에 강박적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문요한의 책 <오티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모두 '쾌(快)'의 감정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즐거움, 즉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사고 싶은 물건을 쇼핑할 때 우리는 감각적인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느낀다. 그에 비해 기쁨, 즉 '희(喜)'는 다르다. 기쁨은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을 말하며 정신적인 것이다. 추운 바람을 맞아가며 겨울 산의 정상에 올라섰거나, 이별의 고통을 겪고 난 후 재회했거나, 밤잠을 쫓아가며 공부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즉,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쾌감과 불쾌감을 아우르는 칵테일 감정인 것이다. 이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에 중요한 연료가 된다. 단, 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일 때 그렇다. 즉,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다. 복잡하게도 인간은 '감정적 낙차'를 좋아하도록 진화해 온 것이다.
(오티움 p45)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여가 시간에 제가 주로 선택했던 활동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소파 위에 뒹굴면서 멍하니 유튜브나 넷플릭스 영상 보기, 컴퓨터 게임 플레이 하기, 맛집 찾아가기..... 대부분이 즉각적인 쾌감인 '즐거움'을 주는 활동들이었습니다. 불쾌감을 거쳐서 도달하는 '기쁨'을 제공하는 활동은 거의 없었어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했던 '독서'에서나마 가끔 '기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감정은 즐거움과 기쁨이다.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즐거움과 기쁨의 이중회로로 행복나선이 그려진 것이다. 핵심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다.
문제는 이 균형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즐거움에 빠져버리기 쉽다. 즐거움은 얻기 쉬운 반면에 기쁨은 시간이 걸리고 어렵기 때문이다. 오래가는 기쁨이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별 고생 없이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럼, 만일 한 인간이 고생해서 얻는 기쁨은 멀리하고, 쉽게 얻는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나는 정신과의사로 일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만나왔다. 기쁨을 느끼지 않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람들! 이들의 행복나선은 즐거움 한 줄로만 이루어져 있고, 이들의 뇌는 즐거움의 회로만 발달되어 있다. 이들은 십중팔구 정신과를 찾게 된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중독'이다. 삶에서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결국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자들은 지금 눈앞의 즐거움에 탐닉한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견디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중독은 오직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삶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그 외의 것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다 시들해진다. 알코올, 섹스, 약물, 도박, 쇼핑, 음식 등이 대표적인 중독의 대상이다. 중독자들의 삶은 중독의 대상을 제외하면 빛이 바래져 있다. 중독의 대상에 탐닉할 때만 생기가 돌뿐 나머지는 온통 잿빛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중독의 대상에 더욱더 매달린다. 그러나 문제는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은 옅어진다는 사실이다. 즐거움은 내성이 잘 생기기 때문이다. 같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그에 비해 기쁨의 감정은 확장성이 뛰어나다. 기쁨은 기쁨의 대상만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주변으로 확산되게 만든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일상까지 생기가 돌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기쁨은 삶의 주름을 펴는 보톡스가 되어준다. 기쁨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은 시들고 인간은 병든다. 우리가 기쁨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오티움 p47 ~ 49)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쉬는 시간이 생기면, 별 어려움 없이 즉각적으로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오락거리들만 찾았기에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없었던 거였구나. 목이 마를 때 마시는 우유 한 잔은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도 계속 우유를 들이켜면 점점 물리고 싫증이 나지요. 우유가 문제인가 싶어 다른 음료수로 바꿔 마신들 거부감만 더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제 여가 시간에 일어났던 것 같아요. 피곤하고 힘든 마음을 달래려 유튜브 영상을 틉니다. 영상이 싫증이 나서 웹툰을 봅니다. 그것도 질리면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고요.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게임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 시들시들해져요. 제게 더 강한 쾌감을 줄 수 있는 자극을 찾아다니지만 어떤 쾌감이든 이내 익숙해지고 싫증이 났지요.
<오티움>을 읽으면서 '고통이나 불편'없이 즉각적인 쾌감을 주는 '즐거움'보다, 자발적으로 고통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얻는 '기쁨'을 추구할 때 더 유익한 휴식을 누릴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감이 들었습니다. 일과 육아로 힘들고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은데, 쉬는 시간에도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니.... 너무 피곤한 일이잖아.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을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은데....
그러나 놀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것은 바로 '놀이의 결핍' 때문이다. 특히, 어른들은 더 심각하다. 인위적으로 기분을 고양시키려고 애쓸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것을 잘 노는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놀이가 없는 어른은 일하지 않는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한다. 그렇기에 여가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만다. 쇼핑, 게임, 음식, 스포츠 관람, TV와 인터넷 등에 시간을 빼앗긴다. 물론 이 시간 또한 재미를 느끼기에 어른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유사놀이pseudo-play'다. '유사놀이'는 놀이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거세하고 유희성만을 남겨놓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놀이를 상품으로 구매하여 소비할 뿐 놀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아무리 생활이 풍족해져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유다.
(오티움 p35)
문요한의 글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합니다. 건강한 놀이가 없으면 유사놀이로 시간을 허비하는, 여가의 소비자로 전락할 뿐 여가 시간을 주체적으로 보내는 어른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놀이가 결핍되면 정신건강이 극도로 나빠질 수 있으며, 여가 시간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균형이 깨지면서 알코올, 약물 등 해로운 무언가에 중독될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하네요. 책 <오티움>을 읽어가며 건강한 '기쁨'을 줄 수 있는 놀이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문요한은 건강한 놀이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능동성', '창조성', 그리고 '유희성'. 즉, 수동적으로 쾌감이라는 자극이 오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론 고통과 불쾌감도 감수하면서 '능동적'으로 활동에 임하여, 의미 있는 결과물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기쁨'(유희)를 누리는 것이 건강한 놀이라는 말이겠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잘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한마디 말로 압축된다. 우리는 이를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하지만 이 말은 여러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자신이란 '영혼'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이 말은 '너의 영혼을 알라'라는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영혼을 안다는 건 어떤 뜻일까? 그 의미 중의 하나는 내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즉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의 영혼에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라"라는 말로 풀어 이야기할 수 있다. 이는 행복에 있어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당신은 어떤 활동을 할 때 영혼의 기쁨을 느끼는가?' 이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다면 자신의 행복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기쁨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당신의 놀이는 무엇인가?'
놀이가 바로 행복이다. 어른도 놀아야 산다. 다만 어른의 놀이와 아이의 놀이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는 건 놀이의 본질이기에 다를 수가 없다. 다만 아이와 달리 어른의 놀이는 상대적으로 초점과 깊이가 있다. 악기를 연주하고, 서핑을 하고, 심리학 공부를 하고, 발레를 하고, 정원을 가꾸는 등 보다 명료한 초점이 있고 배움과 연습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해간다. 이러한 능동적 여가 활동이야말로 바로 어른들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려면 잘 놀면 된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쁘게 하는 놀이가 무엇인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오티움 p39 ~ 40)
이 부분을 읽으며 궁금해졌습니다. '내 영혼에 기쁨이 되는 활동', '활동하는 과정만으로 충분히 즐거워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배움과 연습을 통해 그 수준을 높여가는 놀이'.... 우와. 멋지다.... 그런데 그런 놀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지?
<오티움> 책 p55 ~ 59에서는 '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오티움'이라 정의하면서 오티움을 찾기 위한 기준으로 아래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1. 자기 목적적 : 결과나 보상에 상관없이 그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즉, 보상이 없어도 순수하게 좋아서 할 수 있는 활동인가?
2. 일상적 : 일 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매주 혹은 매 달 일상에서 즐기는 활동인가?
3. 주도적 :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즐기고 배우고 심화시키는 활동인가?
4. 깊이 :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누리며 활동의 수준이 깊어지고 실력이 향상되는가?
5. 긍정적 연쇄효과 : 놀이 활동이 삶의 다른 영역(일, 가정, 관계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위의 다섯 가지 조건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저는 '오티움', 즉 '제 영혼에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글쓰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과 상상을 한 뒤, 이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좋아하거든요. 일과 육아로 바빠서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언젠가 제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내보는 것이 오랜 꿈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글감을 모으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었습니다. 쉬는 시간인데 또 다른 노동을 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글쓰기도 엄연한 정신노동이니까요. 그래도 매일 쓰려고 애를 썼습니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스마트폰 메모장에도 쓰고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공책에도 글을 끼적였습니다. 육아를 할 때 아이들끼리 놀면서 잠시 여유가 생겼는데 글을 쓰기엔 애매할 때에는 제가 쓸 글의 내용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글의 시작은 어떻게 하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우려면 어떤 사례가 좋을까? 참고 자료는 어디서 찾을까?.... 글을 쓸수록 욕심이 생겼습니다. 더 잘 쓰고 싶어졌어요. 문단 구성을 바꾸기도 하고 문장 구조를 변경하거나 표현을 다듬기도 하면서 한 편, 한 편 글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글쓰기'로 여가 시간을 보내면서 삶이 매우 단순해졌어요. 예전에는 쉬는 시간이 생기면 뭐를 할지 고민이 됐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한 저의 견해를 다듬거나, 쓸만한 사례들을 찾거나, 관련 도서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완성한 글을 더 다듬기도 했고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궁금해서 다른 글들을 살펴보며 글쓰기 전략들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육아를 하는 '아버지', 직무를 수행하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 외에 글을 쓰는 '글쓴이'라는 정체성이 생겼어요. 육아에 지칠 때, 그리고 직무를 수행하다 스트레스가 가중될 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하고 모니터 속 글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세상 모든 걱정을 잠시 잊고 오직 글쓰기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직장에서 속상한 일로 자존감이 무너질 때, 글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면서 제가 적어도 글은 쓸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며 다시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여가 시간에 글쓰기로 힘을 집중하다 보니 다시 아버지로, 직장인으로 살아갈 힘도 회복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느덧 '글쓰기'는 여가 시간의 활동을 넘어 제 삶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습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단순하고 단단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것이 '오티움'의 힘이구나.... 하고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저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께서도 당신만의 '오티움'을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책 <오티움>의 부제처럼 오티움, 즉 '살아갈 힘을 주는 나만의 휴식 방법'을 찾으면 삶이 더욱 간결해지고 이전에 느끼지 못한 여유와 행복까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티움> p134 ~ 148을 보면 오티움으로 선택할 만한 활동들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어요. 이 내용을 참고하셔서 여러분만의 오티움을 찾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