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의 진리, 아빠의 일흔 벗들에게서 듣다
아빠 핸드폰에는 3월 2일 한여울 모임이 몇 주 전부터 표시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무겁게 자리 잡은 이벤트였다. (사실 지금 나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그러하다.)
한여울은 아빠 고향 친구들의 모임 이름이다. 어릴 때는 더 자주 만났겠지만 기억은 꽤 희미해졌다. 그래도 그들의 이름은 언제나 익숙하다. 그나저나 3월 2일이 다가올수록 아빠가 나타나지 않으면 찾을 것이 뻔했기에 나는 안절부절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아빠에게도 물어봤지만 "연락할 거 없다."라고 말했다가도 "그래도 보면 힘나지 않겠어?"라 물으니 "그럼 뭐..." 이런 답답한 대답이 또 없다. 여러 약제가 들어가는 터라 약기운이 그를 순간순간 혼미하게 하는 와중에 면회 10분에 많은 것들을 해결하는 것은 늘 역부족이다.
모든 의사결정은 나의 몫이니, 급한 대로 나의 가장 쿨한 벗에게 전화를 해본다. "너라면 친구들이 나 아픈데 오면 어때? 좋겠나? 어른들은 어떨까?" 투머치띵커의 질문에 돌아오는 그의 쿨답, "당연히 오면 좋지, 힘나지- 어른들은 그런 거 좋아해- 너무 생각 깊이 하지 말고 연락드려!" 그가 나를 살렸다. 늘 명쾌한 그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준다.
가장 먼저 떠오른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전화가 울리기도 전에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일흔 줄이 되면 친구 자식이 전화 올 일이 무슨 일이겠나. 생각하면 놀라는 일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여러 번의 통화를 나누고 모임이 있는 당일 점심에 친구들이 병원 로비에 모였다. 나는 아저씨들을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저씨들은 나는 몰라보게 커서 길을 가다가 봐도 못 알아보겠다고 하셨다. 중환자실은 엄격히 면회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 모든 친구들이 아빠를 만나진 못했다. 어제 혹시나 봐줄까 싶어 바리바리 사들고 온 구름떡집 흑임자인절미도 소용없었다. 병원 입장에서도 관리를 해야 하니 이해는 되는 바였다. 아빠가 컨디션이 많이 떨어지는 날이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친구들을 알아보고 영상통화로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늘 이런 시간은 쉽지 않다. 안타까운 마음과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 매일 다른 컨디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나의 입장 등이 어려웠다. 늘 피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내가 힘들다고 그들의 만남의 기회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면회가 끝나고 로비 카페에 모여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 조언들을 나눠주셨다. 아빠를 법명으로 부르는 친구 A는 “네 아빠가 우리보다 몇 년 더 먼저 만난 것뿐, 우리의 생과 사 사이에는 반드시 로와 병이 따라온다. 너무 힘들어할 것 없다. 우리에게도, 시간 지나면 너에게도 있을 일이다. 그것에 대해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은 나를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혔다. 꼭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놀랍도록 현실적인 조언들을 해주는 쌉T 친구들을 보며 이 사이에서 뼛속까지 F였던 아빠는 얼마나 공허했겠는가.. 에 대한 옅은 웃음도 났다.
그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들 중 반복된 키워드는 #순수함 #감성적인 #요즘세상에 없는 #지고지순한 #이상주의자 같은 단어였다. 아빠는 친구들에게 그런 상징이었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래도 우리 아빠는 생과 사 가운데 로와 병을 만난 순간에 외로이 혼자는 아니구나라는 사실에 나보다 몇 곱절 더 위대해 보였다. 언제든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진심을 담은 말들은 모두 잊지 않으셨다. 일흔쯤 살면 욕망에 끄달리지도, 아쉬움에 애달파하지도 않을까? 일흔의 벗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쩐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