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와 부친, 아빠를 모두를 둔 불효자
나는 어느샌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아빠와 나, 우리에게는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각자 스스로의 고난을 헤쳐나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무심했고 그 무심한 정도만큼 멀찌감치 떨어지고 나서는 '아빠'였던 아빠를 나는 '아부지'로 불렀다. '아부지'는 내 딴엔 귀여운 애교가 섞인 버전으로 약간의 노력을 가미한 호칭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라 부를 정도의 각 잡은 거리감은 아니라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거리가 있었다.
'아부지'였던 아빠를 '부친'이라고 부르던 시절은 거의 나의 모든 부분을 그로부터 분리하던 시절이다. 아부지 앞에서는 여전히 아부지로 불렀지만, 내 핸드폰에는 깍듯함을 가장한 거리감의 단어, "부친"으로 저장해 두었다. 부친께 문안인사를 올리는 청학동 출신 소자는 예절 뒤로 숨어 점점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가드레일 너머 역방향의 도로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때로 교차로나 유턴 지점에서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서로 크락션을 자지러지게 울려대며 내가 가는 앞 길을 막지나 마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러댔는지도 모른다. 그런 분노들로 가득 차있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엄마가 아프게 되자, 엄마의 병과 엄마의 사그라듦이 모두 그의 탓이 되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아빠가 피운 담배가, 마신 술이, 엄마가 늘 술 마신 아빠를 실어 날랐던 그 대리운전의 나날들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오락실 문을 부시는 등의 사고를 치는 동안 엄마의 마음을 졸이게 한 일들이, 아주 사소한 일 모두가 원인이 되었다. 엄마의 투병 기간 동안 지난 30년쯤을 상세하게 또, 집요하게 뒤지고 뒤져 마치 국정원처럼 낱낱이 찾아 내 그의 앞에 꺼내보이고 기꺼이 그의 여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가 나의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주고 좋아하던 어느 날의 아침과, 내가 감기몸살로 누워있을 때 펄펄 끓는 이마에 손을 대고 걱정을 하며 동동거리던 발걸음, 내가 세찬 파도에 튜브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닷속을 허우적거릴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나를 육지로 밀어 올려버린 순간과 영화인이 되고 싶었던 내 꿈을 응원하던 그의 지원, 말로는 못하면서 매번 생일마다 도착했던 사랑한다는 오글거리는 문구와 함께였던 호접난을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그렇게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미워할 이유를 찾고 또 찾았다. 찾을수록 그에게 받았던 사랑의 기억과, 그를 사랑하고 아껴야만 하는 이유는 기억 저편으로 버렸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왜인지는 묻지 않고, 지랄병에 걸려버린 나에게 기꺼이 주적이 되어주었다.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엄마가 돌아간 뒤에도 우리는 데면데면했다. 우리는 그의 생일마다 파인다이닝에서 식사를 하고 종종 영화도 보았다. 드라이브도 하고 내가 힘든 날에는 부러질 듯한 꼿꼿함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세상살이에 대해 토로도 했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대책 없이 풀어지기도 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 대한 미움이 다 사라지고 없다는 걸, 사실은 처음부터 있었던 적도 그럴 이유도 없어져버린 사실을 확인한 지난가을 무렵부터 점점 마음이 복잡했다. 마음껏 미워할 때가 속 편했는데 그가 오롯이 하나의 인간으로 내 앞에 섰다.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오로지 성실함과 선함, 바보 같을 정도의 이타심으로 세상을 산 그였다. 주변을 챙기느라 가족은 챙기지 못한 약지 못한 사람. 아부 한 번이면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만리를, 이만리를 한없이 돌아가는 길도 아무 말 없이 무릎이 터질지언정 그냥 걷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 아쉬움 한 자락 내비치지 않는 모습 때문에 미움을 샀을 거다. 그 미움의 대가로 늘 손해를 봤을 거고 늘 외로웠을 거다. 내가 사회에 나와 나의 모습을 보니 나는 그의 거울이었다. 그렇게 유연성이 전혀 없는 대나무처럼 굴다가 대차게 꺾이고 나니 나는 제일 먼저 그가 보였다. 나는 공황발작을 하며 살겠다고 몸을 셧다운을 시키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누워버렸는데, 그는 버티고 버텨 언제고 매일 아침 회사로 나갔다. 그의 30대, 그의 40대는 어떠했을까. 그라고 뭐가 대단히 달랐을까. 수만 번 도망치고 싶었을 거다. 결국 입 벌리고 쳐다보는 새끼들 때문에 매일 아침 회사로 천근 같던 발걸음을 옮겼을 거다.
오늘은 여느 때처럼 얼굴을 닦고 로션을 바르는데 그가 복부근육과 흉쇄유돌근을 힘껏 써서 상체를 들어 올려 볼을 나에게 갖다 대었다. 처음엔 뭘 원하는지 몰라 귓속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뭔가 스킨십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볼을 댄 채로 잠시 있다가 다시 누웠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사이에는 기껏해야 업무로 만나는 클라이언트 사장님과 악수를 나누는, 딱 그 정도의 스킨십만이 남아있었다.
요가를 하며 핸즈온을 해보면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만지는 일이 비단 스킨십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에너지가 옮겨가고 오는 것임을 깨닫는 날이 많아졌고, 그걸 알게 되자마자 나는 바로 나의 부친을 떠올렸다. '그도 누군가와 에너지를 나눌 일이 필요할 텐데...' 그게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것도 알고만 있었을 뿐. 어떤 액션도 취하진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내 얼굴 가까이로 힘껏 올라오는 그의 용기와 노력에 나는 나도 모르게 부친을 다시 '아빠'로 불렀다. 무조건 고맙고 무조건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늘은 구름떡집에서 흑임자인절미를 사서 "모든 의료진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쪽지를 남겨 병원에 조심스레 돌렸다. 아빠 가래라도 한번, 얼굴이라도 한번 더 들여다봐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뿐. 다른 것은 없다.
나의 인생속도를 한탄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는 이 시간을 최대한 현명하게 보내고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