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들을 모아 끊어지지 않고 싶었다.
*2017년 2월의 글에 덧붙여 수정한 글입니다.
나는 메일을 찾아보니 16년 3월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아득한 일이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원고지가 펼쳐졌지만 말문이 막혀 애꿎은 작가의 서랍으로 묵은 글만 쌓아두기 시작했다. 작가 신청을 하던 글에 당시 심취해 있었던 점성학 관련 재밌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겠노라 포부를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원 관련한 글이나 메일은 찾을 수가 없는 걸 보니 플랫폼 내에서 신청하지 않았을까 싶다.) 16년 3월 이후 서랍으로 공개되지 않는 글들을 밀어 넣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브런치를 다시 찾아왔을 무렵에는, 나는 그 시절을 1분 1초까지도 촘촘히 기억해내고 싶었기에, 기록을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던 기록이었기에, 다시 돌아와 읽었을 때는 한동안 들춰보지도 못할 정도로 생생했으며 그래서 무척이나 버거운 기록이(었)다.(지금도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 이 글들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나와 그녀 모두를 위해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오지랖 넓게 이런 과정이 비슷하게 힘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썼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오만한 얘기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그녀와의 시간을 다시 잘 정리해두고 싶을 뿐이다. 오로지 나를 위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2016년 9월, 만으로 57세였던, 진취적이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양자리를 별자리로 가진, 맑고 총명했던 사람, 공주처럼 살았어도 무척 잘 어울렸을 우아한 사람, 장군처럼 살았대도 이상하지 않을 멋진 사람,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어떤 순간부터 그녀를 "다채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녀가 듣지 않는 나의 일기 속에서나, 나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등장했다. "다채로운"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colorful" 정도로 번역되는데, 그 범위는 몹시 좁다. 내가 느끼는 그녀의 다채로움은, 많은 것을 포용하고 열려있는 사람, 모든 이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녀의 그 에너지는 옹달샘물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샘솟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땔감 삼아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갈아 만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가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의 다채로운 사람, 나의 엄마는 2016년 9월 23일 오전 회사에서 몇 주에 한번 있는 철야 상담을 마치고 단팥빵 하나를 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공복상태에서 당이 빠르게 들어오면서 혈당이 오르고 아마 뇌출혈이 진행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아마 자신이 느끼기에 안 좋았을 텐데도 회사와 서울대병원의 거리가 도보로 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병원에 가는 것을 선택했을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직원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거나 씩씩한 사람이니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는 길에 시야가 흐려지고 어지러워졌을 엄마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딸은 한창 머리에 샴푸를 흥건하게 칠갑하고 출근 준비 중이었다. 실눈으로 확인하니 엄마길래, 그냥 '머리 감고 전화해야지.' 하며 머리감기를 마무리했다. 머리를 수건에 말아 올리며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이때 의식이 흐려지고, 어떤 청년의 도움을 받아 응급실로 이동했던 것 같다.(병원에서 알려주었지만 결국 이 청년을 찾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이 날 아침의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정신없는 새에 엄마는 핸드폰에서 나의 번호를 찾아 눌렀을 것이다. 나는 그 통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에게 달려가는 대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는 지금도 되도록 지나지 않는 길이 있다. 생각 없이 네비를 따라 그 길을 들어서게 되면 방통대 앞 이것저것 조형물이 놓인 거리는 애써 주변을 보지 않고 지난다. 그날의 그 거리를 헤매었을 상황이 짐작되어 그 길에서 병원을 오가며 여러 번 머리와 가슴을 쥐어 뜯어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전날 엄마와 만났다. 엄마는 한 달에 두어 번, 한강 다리마다 설치된 무료 전화로 걸려오는 전화들을 상담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사는 일이 팍팍한 사람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화비 몇 푼이 없어 한강다리까지 걸어 나온 학생,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그 일로 다리에서 투신하려는 사람을 설득해 집에 보내기도 하고, 상담전화 끝이 영 마음 놓이지 않아 구조대에 연락하기도 했는데, 그 구조요청으로 이미 떨어진 사람을 119에서 건져 올려 실제 구조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던 날에는 엄마는 안도하기도 했지만 여운이 길게 가는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그 봉사를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날도 엄마와 카톡으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어서 엄마가 사무실에 늦도록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장을 가야 하는데 칠칠치 못해 본가에 여권을 두고 왔다는 걸 알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고 가져다달라고 부탁해 여권을 받으러 사무실에 들렀었다. 엄마는 동료 상담사와 재밌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야근을 하느라 도착했을 땐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시 과업무에 시달려 오는 택시 안에서도 꾸벅꾸벅 졸던 상태였기에 엄마와 짧게 이야기를 하고 헤어져 바로 다시 택시를 타러 나왔다.
택시를 타기 전 조심히 가라는 말과 함께 평소 같으면 그냥 손을 흔들고 헤어지고 말 일인데, 그날따라 엄마랑 짧은 포옹을 했다. 나에게로 뻗어오는 엄마 손길에 나는 일생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 그대로 자석처럼 끌려 엄마 품에 가 찰싹 붙었다. 엄마란 그런 존재니까. 그 품은 언제고 따듯했다. '조금 간지러운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그 품은 마법 같아서 순간 스르르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포옹이 내가 기억하는 병마와 싸우지 않는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