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채로운 사람
4분 33초 퍼포먼스(https://www.youtube.com/watch?v=JTEFKFiXSx4)로 유명한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에 있는 무향실 anechoic chamber - 외부 소음과 격리된 흡음의 방을 방문한 후에 이렇게 썼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릴 줄 알았지만,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엔지니어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전했다. 높은 소리는 당신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다.” 그는 이 경험 이후 모든 것이 음악이고 음악이 없는 곳은 없다고 느꼈다고 했다. 삶이 시간을 흐르는 소리조차 음악이라고 느낀 것이다.
얼마 전 예능에 한 가수가 나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고민의 깊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산 자가 고뇌하는 죽음이 나에게는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가까이에서 느꼈던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고,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은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하기에는 당사자는 준비할 새도 없이 고통을 견디다 무의식으로 정신없이 내달리기 바쁜, 안타깝고 허무하기만 한 것이었기에. 어떤 수사를 붙이기에도 송구스러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삶이 ‘세차게 끝을 향해 흐르고 있음'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거친 물살에 신발 한 짝을 떠내려 보내며 차마 두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다채로운 사람"
나는 20대 이후 언젠가부터 나의 엄마를 늘 저렇게 불렀다.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인 것 같다. 나의 엄마는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고,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나는 그런 그를 마음 깊이 존경했다.
나의 다채로운 사람이 이제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사실 몇 년이 지나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분명 나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년째 나의 일이 아닌 채로 멀쩡하게 지내보려 애썼고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때때로 멀리 어딘가에 있어 만나지는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심지어 욕심도 부려가며 정력적으로 일 했고 매 끼니를 놓치기는커녕 얼마간은 살이 불어나기도 했다.
몇 해 동안 잠을 얕고 설게 자긴 했어도 대부분의 시간을 즐겁고 때로 무려 사치스럽게 보냈다. 비행기를 타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고 좋은 것을 찾아보았다. 문득 터지는 울음과 사그라듦의 순간은 종종 있었지만 모든 일상이 무너져 내릴 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괴로웠던 것은 꽤 나중의 일이었다. 팬데믹을 지나 온 올 한 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당혹스러웠다. 집안 곳곳에 마음을 담아 남긴 메모, 엄마와 함께 입던 옷들. 미쳐 버리지 못한 약 보따리들. (지금도 급하게 두통이 있을 때는 엄마의 이름이 쓰인 응급약을 먹기도 한다.) 냉장고 안에 한가득 양념 통에 쓰인 ‘간장’, ‘참기름’ 같은 엄마 글씨. 때로 아이폰이 알려주는 몇 년 전의 추억 사진들. 어떤 슬픔은 아주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게, 또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나는 여전히 ‘그것’들과 함께 지낸다.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슬프고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기뻐하면서. 언젠가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의 삶이고 또 그의 죽음이다. 나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그의 시간도 영원히 내 삶 속에서 함께 흐른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추억하는 한.
2021년 10월 글 발췌.
시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보니 엄마가 나요, 곧 내가 엄마였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