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분 1초까지 기록해야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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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엄마와 통화를 하지 못하고, 출근한 나는 아침 10시가 좀 넘어 사무실 동료와 아침을 먹지 못했기에, 요깃거리를 사러 사무실 슬리퍼를 끌고 근처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다. 그때 엄마가 응급실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고 놀랄 겨를도 없이 나는 그 슬리퍼를 신은 채로 눈에 보이는 택시를 잡아 탔다. 합정 사무실에서 혜화로 가는 오전 길은 꽤 막혔던 기억이 난다. 속이 타들어가고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어제도 멀쩡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실 전혀 그녀의 건강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무심한 딸년은 할 수 있는 것이 당황 밖에 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벤치에 엄마가 앉아있었고, 대화는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족 중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보호자 등록 후 해야 할 일을 했다. 응급 CT와 MRI를 위해 정신없이 여러 번 지하통로를 뛰다시피 걷고, 계속 '모르겠다.'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사실 속으로 겁을 먹었다. 내가 모르는,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앓는 소리를 하는 게 못난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외칠 곳도 부를 곳도 없어 연신 마음속으로 '제발 제발'만 읊조렸다.
그날 오후께 가 되어서야, 엄마는 오전, 나에게 전화를 하던 즈음에(혹은 전 날) 뇌출혈이 있었고 이유는 오랜 시간 그녀의 머리에 자라고 있던 교모세포종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 커져가고 있던 암세포가, 아침 이르게 먹었던 빵 한 조각의 당 영향을 받아 출혈이 생겼고, 그 출혈로 시신경이 일부 손상된 것 같다고 했다.
잘못 들었습니다? 잘못 들었을 거다. 뭐가 자라? 그게 뭔데? 엄마는 때마다 검진을 받고 아무 전조 증상도 없었는데 뭐래? 작년엔 교통사고 때문에 MRI까지 다 찍었는데 뭔 소리야...
그저 부정했다. 그러고 있는 나의 귀에 뒤이어 박힌 응급의 신경외과 담당의 말은
"돌아가실 수도 있다."였다.
결국 출혈이 있었던 곳을 잡고 지혈할 뿐, 실제로 그녀의 뇌에 자리 잡은 교모세포종의 나이는 꽤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뇌의 길을 따라 길게 퍼진 종양은 수술할 방법이 없어 조직검사를 위해 조직을 조금 잘라낸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낸 1년 남짓의 시간의 거의 대부분 나는 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말을 부정했다. 당시에 기록을 그대로 가져온다.
의사는 면담 때 나에게 엄마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했다. 길면 1년, 짧으면 6개월이라고 했다. 드라마 쓰고 있네. 사실 그 말은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나는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 언제나 엄마는 내게 매 순간 예측할 수 없이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언제나 유쾌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람이었다. 수술을 해내고, 병문안을 오가는 사람들과 울려대는 전화들을 받아내느라 고생했던 작년 가을 내내 나는 엄마가 얼마나 많은 곳에 자신을 흩뿌려 놓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나도 모르는 새, 멋대로 맘대로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누군가의 기둥이 되어놓았다. 며칠 내내 초면에 나를 앞에 두고 눈물을 쏟는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을 거라고... 거꾸로 위로를 해댔다. 사무실 앞뜰 양지에 놓아둔 다육이들이 걱정이라는데, 내 걱정만 빼고 온갖 걱정이 천지삐까리다. 늘 엄마가 내 걱정은 안 한다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 현실부정도 있고, 애써 태연하려는 마음도 보인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세상은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이니, 말도 안 되게 건강한 엄마도 아플 수 있고, 병원이 뭐라해도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미래만 쳐다보고 조급증에 걸려 살던 내가 밟고 선 땅을 자꾸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엄마는, 여전히 나의 엄마였지만 평소보다 밝고 약간은 아이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어쩌면 늘 남편걱정, 자식걱정으로 전전긍긍하며 책임감으로 살던 사람이 외력에 의해 조금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다. 그 모습이 나는 너무 고마웠다.
왜 그랬는지, 나는 엄마가 가능한 동안은 일기를 써주기를 부탁했다. 그때 함께 노트를 사고 새로 만든 엄마의 일기장 제목은 '새로운 인생'이었다. (아직은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볼 용기가 없다)
텍스트를 쓰는 일이 점점 버거워져서 일기는 16년 12월에 멈춰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3개월 남짓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이 글의 마지막에는
모든 순간들을 모아 엄마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싶다.
고 되어있다. 아마 이때의 나의 진심은 저랬을 거다. 이때 남겨놓은 기록들은 여전히 나를 주저하게 한다. 눈물을 쏟으며 쓰는 이 순간에도 그녀와의 기억이 조금씩은 기쁘고 따듯하게 남을 수 있기를 나에게도 바란다.
내 나이가 서른일곱. 나와 같은 나이였던 당시 서른 일곱 엄마에게는 쪼끄만 게 벌써부터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되바라진 초딩 딸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나 하나의 행복, 나의 안녕을 염원하며 살뿐이다.
여전히 모든 순간에 함께 할 나의 다채로운 사람에게 이 기록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