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만난 여자들 이야기
4살 때부터 할머니 돋보기보다 더 두꺼운 안경을 써야 했으며, 신체 전반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아이였던 나는, 그런 아이 특유의 세상에 대한 미시적인 관심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애였다. 매일매일 약간의 우울함을 마음 기저에 깔고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열 살 무렵부터 품고 있다가, 사춘기 시절 ‘사람은 왜 태어나서 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아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도다’ 상태를 거쳐, ‘이왕 태어난 거 아무렇게나 막살아보자’로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수십 년이 흘렀다. 왜 태어나긴, 여성의 몸에서 수정에 성공한 배아가 여성의 피와 살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들어가며 열 달을 잘 버텼으니 태어나는 거지.
베트남 냐짱으로 가는 기차 안. 기차는 후에에서 오전 11시쯤 출발했는데 목적지엔 밤 11시는 넘어야 도착할 듯했다. 뗏Tat이라 부르는 베트남 설 명절 기간이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선물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기차로 버스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10시간 넘게 제 갈길을 가고 있는 기차. 개미보다 좀 더 큰 바퀴벌레들이 꼬물거리며 기차 유리창을 기차 본체와 연결한 실리콘 사이사이 해진 곳을 나왔다 들어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온몸이 그냥 근질근질. 기차의 덜컹거림에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 선물 가득 들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 구경도 지쳤다.
옆 좌석의 할머니도 나만큼 오래 기차 이동 중이신데, 아이를 어르다 잠이 드셨다. 아이는 얼마나 지겨울 것인가. 할머니는 얼마나 고될 것인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 삼대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모두 이 야밤에 어디론가 가기 위해 이 기차여행을 견디고 있다.
아이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아이 엄마가 딸이라고 미리 얘기해주신다. 진정한 삼대, 할머니는 엄마를 낳고 엄마는 딸을 낳았으니 말 그대로 대가 이어지고 뼈와 살이 이어진 삼대다.
저 아이도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모를 것이다. 엄마 배 속에서 수정된 이후 생명이 짜 놓은 프로그램대로 허파 호흡을 시작하고 이제까지 무럭무럭 자라왔고 앞으로도 더 한동안 자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을 터, 이왕 태어난 거 아무렇게나 잘 살아보길. 특정 종교에 기대 그 이유를 찾는 건 비추.
할머니와 엄마가 돌아가며 아이를 돌본다. 먹이고 갈아입히고 달래고 재우고 놀아주고, 가 반복되는 시간이다. 웃을 때 이가 몇 개밖에 보이지 않는 할머니는 주무시다가도 아이가 칭얼대면 저절로 온몸을 움직이며 눈을 감은 채 아이를 어르신다. 아이가 안정되니 할머니는 뒤에서 아이를 안은 팔을 단단히 단도리하신 후 다시 잠에 빠져들고 아이가 빤히 나를 쳐다본다. 막간을 이용해 내가 좀 웃겨줬다. 내 노력이 무색하게 웃지는 않고 제법 진지하게 나를 집중해 보고 있다. 아이의 무표정이 웃겨서 휴대전화를 꺼내 별생각 없이 할머니와 아이를 사진에 담았다.
12시간이 넘는 지루한 기차여행 동안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이니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채로 잊혔다. 한참이 지나 문득 휴대전화에서 튀어나온 이 사진이 뒷골 땡기게 나를 놀래키기 전까지는.
이 사진은 여행의 맥락을 지우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할머니는 실존하지 않는 존재인 듯 음침한 그림자처럼 아이 뒤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이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서웠다. 아이의 미래를 저 할머니가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는 생 이후 로병사의 운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이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로병을 거쳐 사에 가까이 다다른 또 다른 운명에 꽉 잡혀 있다. 사에 이르러서야 벗어날 수 있는 생로병사의 운명. 여기에 우연히 사건 사고가 겹쳐 로병 없이 간다 해도 결국 종착점은 같다.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 사진 속 그 아이는 어깨에 그날 할당의 고민을 무겁게 지고 지지부진하게 하루를 보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라고 뭐 다를 거 같아?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여기를 떠나고 싶다면 일어나서 짐을 싸. 고만 징징대고.
편안한 집과 새하얀 변기가 주는 안정감을 못 떨치고 뭉기적거리고 있을 때, 길을 떠나면 집에 가기 싫고, 집에 있을 땐 길 떠나기 싫고, 기껏 흥분해서 비행기 티켓까지 다 예매해놓고도 떠나기 전 날엔 티켓을 취소해버릴까, 같은 쓸데없는 고민으로 밤을 새우는 문제적 인간은, 이 사진을 앞에 두고 아이가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삼대 모녀가 함께 이동하는 이 공간. 방향은 달라도 그들도 나도 조금씩 죽음과 가까워져 간다. 그러게 말이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가 말해준 대로 티켓을 예매하고 짐을 쌌다. 그렇게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