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련의 코로나 사태로 홀홀 단신인 채로, 친구와 동료 그 누구 와도 거의 접촉이 불가능한 채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이 비는 무료함, 현재의 상황을 잊을 수 있는 몰입의 필요성에 의해, 그리고 부족한 온기를 채우려는 일환으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매일’ 한식,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서 가족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간의 매일이 해외영업 프로젝트 유치라는 명목 하에 밥 때도 잊어가며 일하는 게 일쑤였고, 한 달에 한두 번 겨우 간단한 걸 만들어 먹기가 고작이었던 내게, 요즘은 밥 차려 먹는 재미가 쏠쏠해서 재택근무를 끝내기가 아쉬울 정도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길거리서 파는 떡꼬치 같은 걸 흉내 내서 만들어 동생과 나눠 먹기도 하고, 마트 정육점에서 파는 수제 돈가스를 사다가 집에서 튀겨 먹을 줄 알았다. 맞벌이하시던 부모님 대신에, 어린 남동생을 보살피고, 행여라도 맛있는 거 해 놓으면 부모님 돌아오셔서 한 번이라도 나를 더 봐주시지 않을까, 칭찬이라도 한 마디 더 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영악함에서였다. 내가 사 남매의 막내인 엄마의 장녀로 태어났을 때, 엄마와 나이 터울이 큰 이모는 병원이 떠나가라 통곡하셨다고 했다.
‘그 자식, 뭐라고 달고 나오지.’라는 말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는 꽤 흔했을 거란 생각을 하더라도, 이모가 아들 하나 낳으려고 딸 여섯을 낳으셨다는 이야기를 감안하더라도, 내가 자라는 내내 그 이야기가 내 발목을 잡고 나를 가라앉혔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원만한 교우 관계를 유지해도, '너는 아들이 아니라서 안돼’라는 말이 나로 하여금, 끝없는 오기와 고집을, 그리고 크나큰 공허의 집을 마음에 짓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늘, 조용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어 하던 아이였다.
그런 나를 무조건 예쁘다고 해 주시던 게 나의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셨다.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 반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수업이 파하면, 나는 달려서 친가로 향했다. 당시 친가와 학교의 거리는 걸어서 십 분이었고, 달려가는 길 중간에는 상상력도 감수성도 너무 충만한 내가 사랑하던 만화방도 있었다.
만화책을 한 아름 빌려 대추나무가 야트막한 마당에 피어 있는 청기와 이층 집에 들어서면 정겨운 아줌마 (아버지의 중학교 시절부터의 유모라고 하셨다)의 목소리가 들리고, 어쩌다 일찍 퇴근하시고 들어오시는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계셨다. 아줌마와 할머니와 그렇게 점심을 같이 먹을 때는, 늘 식탁에 오르던 반찬이 있었다. 바로 짠지였다. 노란색으로 물들여 잘 익은 짠지를 얇게 썰어서 시원한 물에 담가, 실파 쫑쫑 썰어 얹은 그 가녀리고 투명하고 물컹한 맛이란. 열 살도 안 된 계집애가 좋아하기에는 분명히 자극도 없고 짭조름한 맛이었을 텐데, 내게는 그 맛이 두 분의 얼굴처럼 너무나 정겨웠다. 가끔은 거기에 무말랭이도 있고, 김치도 있었겠지만, 짠지의 그 약간은 꼬릿 한 소금기가, 지금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내 눈물 맛과 닮아 있다.
명반을 사다가 봉숭아 물을 들이던 주말도 있었고, 명절이 되기 전에는 엄마도 합세해서 신문지를 깔고 전을 부치는 날도 있었다. 할머니는 김치전을 뒤지개 없이도 잘도 뒤집으셨다. 전 부치실 때면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짧은 머리의 할머니는 내 눈엔 참 멋져 보였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옆에서 뭐라도 해서 인정받아 보겠다고 열심히 손 굴려 동그랑땡을 빚었다.
지금도 마음이 우울할 때는 소고기 돼지고기 나름 비율 따져 다지고 섞어서 파 마늘 후추랑 두부 으깨 넣고 만드는 동그랑땡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나는 참 좋다. 기름 냄새가 나는 날에는 그 전후로 친지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그렇게도 명절 때마다 현관마다, 신발들로 가득 찼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인가, 할머니가 췌장암 말기로 밝혀지시고 방에 누우신 후, 나는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이 할머니의 자개장에서 하나 둘 물건이며 문서들을 빼가고, 유산 때문에 싸운다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런 어른 따위 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딸 없이, 사형제 맞벌이하시며 길러 내시고, 늘 추운 데서 허겁지겁 식사하셨다던 할머니. 주말마다 찾아가면, 손녀인 나를 씻기시면서 계집애는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할머니. 내가 기억하는 건 무엇보다도, 몸이 엄청 말라가시면서도, 황달기 있던 그 얼굴로 애써 웃음 지어 보이시며, 나를 보실 때마다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시던 날 그 이층 집 대문 위에 조의가 걸리고, 마당에서는 분주하게 엄마랑 아줌마가 상문객 대접하실 음식을 하시는데, 거기에 더 이상 고소한 기름 냄새는 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울면 항상 재수 없다고 혼이 났었기 때문에, 장례식장에서는 병풍 쳐진 관 앞의 할머니 영정 앞에서 우는 것조차 겁이 났었다. 그래서 그냥 이층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여 흐느꼈던 기억이 난다.
다시는 할머니랑 정답게 부침개 부칠 수 없겠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아줌마는 본가로 가버리시고, 할아버지도 내가 대학교 졸업할 때 즈음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유학 중이던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불효 막심한 손녀가 되었다. 그렇게 너무 빨리 나는 내가 원치 않았던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러나 그렇게 원했던 나의 가족도 만들지 못했다. 그렇게 달려간 길 어느 한가운데서 멈춰 선 순간들마다, 너무 힘이 들 때마다, 혼자라는 생각에 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동그랑땡을 부치고 김치전을 지졌다. 이 더운 나라에서 왜 그렇게 땀 뻘뻘 흘려가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한 접시를 만들어 내느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기름 냄새가 공기 중에 돌아야 타향에서라도 명절 기분이 들었고, 그제야 비로소 사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따스했다.
누군가가 사람은, 서른이 지나면 살아온 나날 가운데 맛있게 먹은 음식들을 찾는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엊그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처음으로 고추와, 무, 그리고 소금을 엄청 사다가 짠지를 담가 보았다. 그때의 그 맛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마주 보기 시작한 사실일 거다.
지금도 나는, 마음에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이층 집에서 울던 나를 꿈에서 본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 날에는 할머니와 마루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본다. 거기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외로워서 마음을 열지 못한 그 계집애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가족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꼭 할머니께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정겨운 그분의 기억으로 오늘도 지지는 한 장의 전에서 나는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그때의 행복한 기억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고, 지금 내 곁에 설사 아무도 없다고 해도, 결코 나는 혼자인 게 아니다. 기름 냄새 풍길 때마다 내가 지져내는 건 그분에 대한 무한한 감사함과, 동시에 계집애라는 서러움이다. 결코 내 편일 수 없었던, 그 광활한 외로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