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행동하기
근래 들어 자주 그 인간의 꿈을 꾼다. 그런데 환하게 웃고 있는 꿈은 처음이었다. 신나게 자기 여동생과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면서 어젯밤 꿈속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제 살 만한가 보네. 다행이다' 하지만 깨고 나서는 또 이렇다. '이제 좀 그만 봤으면 좋겠다.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잘못된 인연 선택한 것도 내 죄니까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은 그만 좀 느꼈으면 좋겠다.' 삶에서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덜컥 혼인신고를 하고 그치들과 장어를 먹던 순간이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잘 살아보려고 했던 나, 그 순간을 되돌려 진짜 너 자신을 위한 결정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해 주고 싶다.
내 이십 대 후반은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 위에 혼자 서있는 격이었다. 최악과 차악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할래? 라며 운명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지탱하고, 내가 나를 정의하던 두 가지 가치, 즉, 내 학업과, 내 가족을 둘 다 놓아버리고 내가 살기 위해 치고 나가야 하는 순간들이었다. 나를 지켜주던 두 개의 울타리가, 한 사건으로 인해 모두 공중분해된 듯한 그 해의 겨울. 참 춥고 모질었다. 목표가 있다가 사라진 나는 참 초라했다. 큰 물로 나가고 싶었는데 다시 전보다 못한 수조에 갇힌 볼썽사나운 물고기 한 마리가 된 것 마냥, 나가지를 못 한 게 6개월 정도였을 거다. 나흘 정도 세수를 안 하고 머리도 안 감고 뭘 해야 하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 라며 방에 처박혀 있었다. 몸이 아팠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더 아팠다. 평생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았는데 가족들에게 아무런 심적 지지를 받지 못한 것과, 장학금 못 받아서 유학 가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그냥 대출이라도 받아서 미국으로 가 첫 1년을 버텨볼 걸, 학교에서 받아준다고 할 때 갔으면 이런저런 꼴은 안 봤을 텐데 후회도 했다. 집에서 그렇게 식충이처럼 있는 것도 싫고, 모아둔 돈도 떨어져 아끼던 금 목걸이까지 팔고, 그저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 신청을 했다. 회사 다닐 때 여행으로 한 번 가 본 게 전부였던 거기를. 호주에 오래 살았고, 그 여행을 함께 갔던 친구가, 진짜 비행기 표 끊고 떠나려는 나를 앉혀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호주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물론 내 삶이 걱정돼서 그랬겠지만 그 말이 아파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되고 싶어서 직장도 관두고 이제껏 그렇게 공부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언제 열심히 안 산 적 있어?"
하지만 내 말은 울음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호주로 떠나지 않았다. 대신 일본으로 갔다. 연고가 있는 곳이 그나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엄마는 사촌오빠가 있는 일본으로 가서, 식당 오픈을 도와주라고 했다. 나는 사촌 오빠를 탐탁지 않아했던 아버지를 열심히 설득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야 이골이 날 정도로 해왔기 때문에 식당이든 바든 커피숍이든 일 안 해 본 곳이 없었던 나다. 그때 나는 부력이 필요했다. 깊고 깊은 풍랑 속에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명조끼가 필요했고, 그걸 사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사촌 오빠는 이미 친척들과는 등 돌린 지 오래였고, 일본 여자랑 결혼했다고 했다. 난 엄마가 그 오빠의 엄마인 작은 이모랑 연락하는 게 싫었다. 이모는 사촌 언니들의 돈까지 다 빌려서 미국으로 사라진 상황이었고, 내가 일본으로 간다고 한 걸 언니들이 알았다면 나를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차악임을 알면서도 한국 집에서 무지렁이처럼 안 살려면 어딘가 도망쳐야 했다. '일자리를 가서 찾아야 하는 호주보다는, 최초 일자리가 보장된 일본이 그래도 낫지 않겠어?'가 내 결론이었다. 난 겁쟁이였다. 한국에서도 마음만 굳게 먹었으면 독립했을텐데,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촌 오빠의 처인 언니가 직원 숙소라고 빌려준 곳은 컨테이너를 개조한 이층 집 한 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마룻바닥에, 집 들어서면 양옆으로 개수대랑 화장실이 덩그러니 있었다. 수도며 가스 이런 걸 다 개통하고 앉았을라니 마냥 서글펐다. 오래 정착할 생각으로 왔건만. 그 8월은 밤마다 태풍이 몰아쳤다. 급한 대로 도착한 날 밤 아무것도 없던 그 방에 요가 매트를 깔고 누워서 랩탑을 켜고 영화를 틀어놓으며 잠을 청했었다. 왜 이렇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렇게 주 6일 일 15시간씩 일을 시작했어도 나는 침대를 사지 않았다. 그냥 오기였다. 꼭 곰이 쑥 먹고 100일만 참으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버티면 좋은 일 생길 거라 마냥 믿었다. 요가매트 위에서 자던 그 순간 동안만큼 나는 마음만은 편안했다. 돈을 쓸 시간도 없고, 일을 하면 밥은 주니까, '돈'이라는 한 가지만 바라보고 살았으면 되었으므로. 형광등조차도 없던 그 집에는 그래도 욕조가 있어서 참 좋았다. 밤마다 혼자 끙끙 앓아가며 반신욕을 하고 매트 위에 누우면 생각 없이 잠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보니 어느 정도 예견했던 거지만, 사촌 오빠랑 그 언니보다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주방장 내외분들이나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더 진실되게 나를 대해주었다. 언니네 집에서는 날 견제해서였는지 나를 홀 매니저라고 부르면서도 캐쉬어에는 손도 못 대게 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어도 속으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차피 쓰여지다가 버려지겠구나. 때가 되면 내 살 길 찾아야지'.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바람과 비가 내 친구였다. 하루 종일 사람들한테 시달리면 드라마나 영화도 보기 싫어진다. 쉬는 날에는 중고 만화 서점에 가서 각권에 백 엔 하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내 최애 컬렉션을 쌓았다. 사실 나는 근처 있는 바다를 가서 보고 온천욕도 하고 싶었는데,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간섭받지 않고 내가 누구인가, 뭘 하고 싶은가를 깨달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때와는 참담하게 다른 그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나의 시간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추석의 달을 보며 내 인생 좀 풀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화장실을 윤나게 닦고 또 닦으면서 내 마음도 닦았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보다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한 오빠 내외는 주방장 내외분을 싸움 끝에 내보내고, 나에게는 정식 비자를 내줄 테니 있으라고 했다. 난 정말 거기서 그 분들 없이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난 그만 두겠다고 했다. 빌린 집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려고 얼마 안 되는 가재도구는 중고 매매점에 다 팔았다. 거기서 다 수거해가는 대신 한 푼도 못 건졌지만 난 형광등도 없던 그 집에서 내가 겪었던 두려움을 그대로 후임자에게 돌려주고 싶었나 보다. 못됐지, 나도. 그 후임자가 이모였단다. 어떻게 한 번 외국인 신랑 만나 시어머니 모시고 살며 잘 살아보려고 했던 그 일본인 언니가 안쓰럽다. 생각해보니 나도 여기서 그랬었네, 불과 몇 년 전에. 그때 마음 곱게 쓸 걸 그랬나, 미안하다.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인데. 먼 친척은 남보다 못하다. 나는 그들의 결혼식 본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물론, 오래 못 살았을 거다 둘은. 사촌 오빠는 신혼 초에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 가게도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언니의 노후 자금인 연금을 끌어다 써서 연 것이었다. 그 언니 어머니에게 그때, 말해 줄 걸 그랬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지 거기서 다른 직업을 알아볼지, 나는 며칠을 주방장 내외분 집에서 신세 지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까 엄마가 그동안 번 돈 내놓으라고 아침마다 다그쳐댔다. 도망가고 싶은 데 갈 곳이 없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앉아서 기도하다 울다 한 달여를 그렇게 있었다. 그래도 구직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어떤 기업에 다행히 다시 취직은 했다. 2009년부터 2012년, 몇 번이나 직장을 갈아타며 내 인생이 롤러코스터 탄 걸 생각해보면, 한 편의 글로는 많이 모자라다. 돌이켜 보면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고, 나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의존했기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냥 나 하나만 생각하고 살 걸 그랬다. 난 나를 옥죄는 한국을 벗어나려고 참 많이 발버둥 쳤다. 그렇게 지금 이 나라에 와서 8년 동안, 나는 무엇을 겪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생에 이유 없는 가르침은 없지 않을까?
결국 여기 와서도 나는 같은 실수를 번복하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상처 받았다. 하지만 회복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 자신을 믿어주게 되었고,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다는 아주 당연한 걸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만 있었다면 나는 그냥 박제된 채로 살았을 것이다. 우울함과 모멸감에 치를 떨면서, 성취감 같은 건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았겠지, 가족에 대한 의무감만 남은 채로. 가 보지 않은 길이니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 인간과의 시간도 내 인생에서 싹 도려내진 것 같다. 이제 다시 꿈에만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최초의 내 편이라고 여겼던 '남의 편'.
오롯이 혼자서 모 아니면 도인 삶을 살더라도, 좌충우돌 내 마음만 믿고 가면 괜찮다.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취해야하는 중요한 시기에 도망만 가지 않으면 된다. 내 생각을 누르고 남의 의견을 따라가면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지옥 같은 시간들이 찾아온다. 인과응보다.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면 나 자신을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고, 이성적이어야 하고, 돈에 대한 여유도 획득해야 한다. 인생 참 쉽지 않지만 어디 나만 그럴까. 내가 택한 방향과 목표에 대해 행동하고 표현하고 노력하자. 적극적으로 내 방식대로 내 인생을 개척하면 빛 들 날 올 거라 믿는다. 남들의 눈에 나를 맞추어, 나 자신과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더럽히면서까지 겉보기에 행복한 삶을 영위할 필요는 전혀 없다. 행복은 내 마음이 편안해야 오는 거니까. 우울하다는 정서가 올라올 때마다, 한국의 답답했던 내 방 침대보다, 아무것도 없던 방의 그 요가 매트를 떠올리는 건, 나 이제 괜찮다고 자위하면서도 다시는 잘못된 선택 하지 말자는 다짐인 것과 같다. 부디, 행복하자.
추신 : 이 글의 관점은 그 당시의 상처받은 '나'다. 지금도 엄마를 미워하는 건 아니다. 그때 풀어야 할 걸 풀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의 숙제와 의식을 치루고 있음이다... (https://brunch.co.kr/@aileensoyeonjan/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