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따뜻한 담요 한 장

브런치에 대한 단상

by 장서율

어렸을 때, 그러니까 8살쯤 되었을 때의 기억이다. 우리 집에는 호랑이 그림이 크게 그려진 크고 두껍고 보드라운 담요가 한 장 있었다. 추운 날 창문에 볕이 들 때, 그 안에 들어가서 웅크리고 잠이 들면 마음이 아주 편했던 기억이 난다. 찰리 브라운에 나오는 블랭키처럼 나는 겨울이 되면 그 담요를 껴안고 뒹구는 걸 아주 좋아했다. 엄마를 비롯한 친척들의 관심이 내 동생에게 쏠려있다는 걸 자라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동생이랑 무엇인가 때문에 싸우면 항상 혼이 나는 이유는 하나였다. '누나가 돼서 동생을 잘 보살펴야지, 양보했어야지'


그때 난 화가 많이 나서 엄마가 아끼는 장롱을 막 때렸다. 엄마가 시집오면서 해 오신 농이었는데 엄마는 나를 엄청 혼내셨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거기 난 상처 자국을 메꾸려고 비슷한 색의 크레파스를 칠하면서 내내 울었다. 어릴 때 동생을 챙기지 않았던 기억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나도 애였으니까 실수들은 많이 했을 것이다. 엄마가 청약으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 전에 살던 집에서 나와 이모네 반 지하 방에 세 들어 살았을 때가 있었다. 반지하 부엌에는 '응답하라 1988' 시리즈에 나오는 곤로가 있었다. 거기에다 동생이 배고프다고 하면 라면을 끓여먹였던 기억도 나고, 어느 날 자다 깼는데 엄마가 없어서 마당에 나가 막 울다가 장례식장에 다녀온 엄마를 보고 안심했던 기억도 난다. 그 날 나는 집안에서 귀신 비슷한 걸 봤던 것 같거든. 동생은 세상모르고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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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이 유약한 아이였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이다. 엄마가 너무 좋은데 동생에게 뺏겨버린 엄마를 질투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한테 칭찬 들으려고 숙제도 책가방도 늘 혼자 챙겼다.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시험을 볼라치면, 그때마다 너무 긴장해서 얼굴에 두드러기가 돋는 나였다. 만약 시험 못 보면, 행여나 성적이 떨어지면, 집에서 쫓겨나면 어쩌지.. 혼나면 어쩌지..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을 할 만큼, 몸도 마음도 작디작은 나는 내가 '있는 그대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없었던 거다. 뭐든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 내야, 칭찬받아야, 이 집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아주 일찍 찾아들었다. 그렇게 매번 시험이 끝나면 나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그 담요를 덮고 새근새근 잠드는 이완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찰리 브라운이라는 만화를 진작 알았다면, 내가 왜 그렇게 담요에 집착했는지 알았을 텐데. 어린 나에게 부족했던 게 뭐였는지, 나는 왜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는지 미리 알았다면 덜 아팠을 텐데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인생은 어차피 시험의 연속이고, 마음에 관한 것이든, 직무나 지식에 관한 것이든 공부는 평생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어렸을 때 내 안에 도사렸던 두려움은, '혼자서' 어떻게 이 험난한 이 세상을 버틸까 하는 거였는데, 닥치고 보니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칭찬에 대한, 그리고 인정받기 위한 중압감 때문에 학교 다니는 내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었고, 살면서 날카롭고 예민한 신경증에도 시달렸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반추할 수 있는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오히려 나를 삼켜왔던 수많은 파도들에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처럼, 상쾌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모든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안의 상처들을 바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느끼게 된 감정들이다. 상처들을 덮어두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아프다고 징징대기엔 안타깝게도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버렸다. 모습은 어른이어도, 마음속을 치유해 줄 담요(blanket) 한 장 옆에 두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열 편의 글을 쓰며 계속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하는 글만 쓰는 것 같아서 답답했다. 하지만 그 한 편 한 편을 쓰고 나서, 나는 좀 더 내 인생에 대해, 나란 존재에 대해서 조금 더 기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하고, 또 자기 위로랍시고 그분들을 괴롭게 한 건 아닐까 하는 가벼운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사유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 나의 억눌렸던 정서에 대한 느낌을 적어나가고 싶다.


나는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 아주 오랜만에 그 담요를 다시 덮고 자는 기분을 느꼈다.


사진 출처 : pinter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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