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atization

신체화 : 나의 역사와 기록

by 장서율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살면서 부단히 겪은 '신체화'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이다. 신체화는 정신분석 용어로 사전적 의미는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데, 쉽게 말하면 마음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신체적 현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긴장하면 식은땀이 흐르고 먹은 것이 없어도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은 느낌.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그 대표적인 예시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빈도와 강도가 세지면 내가 통제하지 못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자라면서 외로워서 타인의 삶을 허구로 각색한 영화들을 보며 그것들로 삶의 지표(milestone)를 기억하는 나였다면, 이제는 내 마음을 가린 암막 커튼을 열고 진정 '나의 시간'을 살고 싶어, 그간의 기록들을 열심히 남겨본다.


[ 신체화 : SOMATIZATION ]
욕동, 방어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과 같은 다양한 자극에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성을 말한다. 즉 정신 에너지가 신체적 증상으로 표현되는 것을 일컫는다. 던바(Flanders Dunba)는 이 것을 신체적 단락(somatic short circuit) 전환 반응과 기관-신경증 장애 모두를 포함한다. 슈르(Max Schur)에 의하면, 신체화는 급성 또는 만성적 갈등에 대 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퇴행을 증상으로 연결시킨다. 정상적 성숙의 일부분인 고통스러운 자극에 대한 아동의 신체적 반응은 점차 행동이나 사고 과정에 의해 대치된다(탈신체화 발달 단계의 특징인 신체화를 포함한다. 슈르는 이것을 재신 체화(resomatization) 자아의 능력이 필수적 조건인 반면, 재신 체화는 아직도 일차 과정이 우세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중립화를 이루지 못한 실패와 관련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체화 [SOMATIZATION] (정신분석 용어사전, 2002. 8. 10., 미국 정신분석학회, 이재훈)
슈테켈 W. Stekel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고 심리적 조건에 따라서 신체증상이 생기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전환의 개념과 유사하다. 전환 히스테리, 불안신경증 및 심신증에서 볼 수 있는 신체증상의 성립을 의미한다. 혐오감이 일과성 구토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수도 있고 정신적 갈등소화성궤양과 같은 기질적 질환으로서 신체화되는 경우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체화 [somatization, 身體化, Somatisierung] (간호학 대사전, 1996. 3. 1., 대한 간호학회)


부모님의 해외 근무로 어쩌다 보니 중고등학교를 다섯 번 전학하고, 자아 형성에 있어서 좀 많은 태클이 있었다. 대부분의 괴로움을 성취감으로 이겨냈는데, 막상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진학한 대학교 때는 술만 마시는 내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몇십 번의 여행을 다니며 살았다. 아르바이트나 공부는 계속했지만 내내 삶에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그 무엇인가는 모두 '내 안에 있던 문제들'이었다. 바로 '싫은 건 싫다고, 좋은 건 좋다고' 말만 할 수 있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고 강해져야 한다고 바보 같이 쓸데없는 에너지만 양보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일들이다. '자기 수용'이나 '인정' 같은 건 자기 검열이 강하고 강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억지로 대기업이라는 틀에 나를 맞추며 살다가, 행복하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서 일을 관두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 때 이후 두 번째로 저체중을 찍었다. 그 시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누워만 있어도 괴로웠다. 비타민을 챙겨 먹기도 귀찮은데 우울증 약을 가족이나 친구 몰래 챙겨 먹는 건 사실 좀 많이 귀찮았다.


'무슨 약을 그렇게 먹어?'

' 어, 감기약이야'


주변 사람들의 질문들을 받고 내 상태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말이 논리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울음부터 꺼억꺼억 나오니까. 우울증은 생각보다 질기고 힘이 센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다는 걸 친한 친구에게 말하니까, '왜 자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울던 그녀 앞에서, 나 자신보다 그녀에게 상처 준 게 더 미안했던 나니까. 지금도 가끔 견딜 수 없이 우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내 기분이 이렇구나 하고 알아차려주고 충분히 쉼을 가지면 된다. 상대방도 내 상황을 설명해 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고 적당한 수준에서 양해를 구하면 된다. 대부분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주려고 하지만, 사실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나의 우울이 뭉게구름 같은 모양을 한, 금방 사라질 신기루였던 것처럼.


그즈음 집에서 큰 인테리어 공사가 있었다. 1988년도부터 살던 아파트였으니 20년 즈음 지난 시점에서는 어떤 공사가 필요했을 것도 같다. 집에서 지내기가 나쁘니 몇 주 정도 외숙모 댁에서 신세를 졌었다. 잠깐 마주치는 것보다 일상을 같이 하면 숨길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밥 먹고 약을 챙겨 먹는 나를 보고 숙모는 '항우울제구나.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라며 가만히 안아주셨다. 그때 나는 마음이 뭉클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숙모는 덧붙였다.


'너의 엄마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많이 힘들었을 거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다음부터 만들게 된 내 신용카드는 엄마의 현금 서비스를 돌려 막아주다가 결국 막혀버리는 일들이 많았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밥 사준다고 했을 때 신용결제가 거부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창피했다. 딱 한 번 명품 가방이라는 걸 사서는, 6개월 동안 도시락을 싸서 회사를 다녔다. 월급을 모아서 펀드를 들고, 그 돈의 정확히 두 배를 만들어 엄마에게 드렸다. 그러고 나서는 점점 더 큰 기대와 요구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누가 시켜서 했던 일이 아니었는데.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잘난 딸'이었으나, 그 틀 안에서 진짜 나는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던 건 그 시절의 긴 악몽을 통해서였다. 유체 이탈이 일어날 만큼 심한 가위에 눌리다가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엄마였다. 반가움에 '엄마'라고 외쳐보면 그 또한 꿈이었다. 그건 엄마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다. 내 인상이 이뻐야 한다며 생각도 없었던 성형외과에 나를 보낸 것도, 유학자금을 몽땅 날려먹고 내게 나 몰라라 했던 것도,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어 밥통에 곰팡이가 피게 했던 것도, 모두 엄마였다. 나는 아버지의 끼니를 챙기느라 내 힘으로 떠난 어학연수 때도 죄인처럼 아버지에게 미안해했다. 단 서너 달 동안 가는 거였는데도 아버지는 화가 나셔서 일주일 동안 내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깨지 못하고 울던 수도 없이 많은 밤들 속에서 내가 바랬던 건 단 하나였다. 엄마에게 내 화가 난 마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더 이상 엄마가 나를 자기 틀 속에 넣어 형상화하지 않는 것. 나도 안다. 나 잘 되라고 채찍질하셨다는 걸. 그러나 그 사랑의 방식은 틀렸다고 늘 말하고 싶었다. 늘어나는 스트레스성 탈모가 신체화 발현이었으니까. 거기에 음주와 담배는 옵션이었다.


막 열한 살이 되었을 때쯤이었나. 나는 빠른 신체 발육만큼 이른 사춘기가 왔다. 어떤 다툼 끝에 엄마가 내게 울면서 외쳤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그때 내가 생각한 엄마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비난하는 나를 엄마는 되레 자기가 아프다고 나를 힐난했다. 중학교 때의 해외로의 전학 후 적응이 힘들어서 울면 '너를 보면 아버지가 마음 아파한다'며 나를 안아주지 않고 다그치던 엄마가 있었기에, 나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강해졌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 몇 년 동안 집에서 울지 못했다. 그런 트라우마들이 모여서 내 안에 '상담'이라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심리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하다가 교내에 '학생 상담 연구소'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교 내에는 학생들이 모르는 부가 서비스/ 부대시설이 참으로 많더라. 심리학과 대학원생들이 상담 실습도 할 겸 교내 학생들에게 서비스로 상담을 해 주는 형태로, 초기 인터뷰를 하고 나면 상담자를 배정해 준다. 애니어그램이나 MBTI 같은 검사들을 하고 나서, 나는 최초의 석사 과정 선생님이 아닌 박사 과정 선생님에게 리퍼 (refer)되었다. 매주 한 시간 정도 상담을 받았고, 매 순간 울음으로 끝이 났다. 선생님은 행동 일지를 만들어 작성하라는 숙제를 주셨다. 보통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는지, 그런 걸 적는 거였다. 그다음에는 피드백을 받아서 '다음번에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자기 생각을 표현해 보세요'라는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1년쯤 뒤 교환학생을 갈 때까지 상담은 계속되었고, 신기하게도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있으니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 아마도 가족보다는 나 자신에게 온전히 포커스가 맞춰질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두 번째 장기 상담은 그 10년 후였다. 직장과 대학원을 돌아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 준비를 할 무렵, 마침 내가 일하던 곳이 한 대학교 안에 있어서 거기서 내담자/피실험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원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에 초점을 맞춘 상담이었지만, 약속된 10회 차를 훨씬 지나서도 내 상담은 끝나질 못했다. 13회 차에 이르러서야 내 감정을 표현하는 한 가지 표현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지난 경험들이, 그걸 싸잡아서 나의 노력이 모자랐다, 이러쿵저러쿵해대는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말이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어떤 강요를 하지 않는다. 물론 내담자의 상태에 따라 상담 기법/전략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내담자가 스스로 느끼도록 해 준다. 끝없는 인내심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던 그분은 그 녹음 파일을 주시며 다시 들어보라고 하셨다. 살다 보니 그 파일들을 들어본 게 정확히 다시 10년이 지나서다. 그 세월 동안 내 안에 쌓인 경험들과,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해 보니, 비로소 최근 모든 아귀가 맞춰졌다. 내 안에 나라는 사람의 욕구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주려고 했던 나 때문에. 진짜 나답지 못했던 나 때문에. 그래서 사랑에 끝없이 실패했구나.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서 불편했구나. 그래서 오래 한 곳에 뿌리내릴 수 없었구나.




그리고 다시 10년 뒤, 세 번째 장기 상담을 10주에 걸쳐 이번 주에 막 마무리했다. 화자로서 이야기를 하고 이해받는 것, 그리고 공감 속에 받게 되는 피드백 (feedback)이라는 건, 화자가 청자로부터 수용하며 받아주어야 비로소 유효한 것이다. 화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최초의 사람에게 받는 피드백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타인인 엄마와의 유대와 피드백의 경험이 가 중요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내 행동의 수정과 훈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자신은 마냥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서 자신의 아이에게는 엄격했던 엄마. 피드백을 할 때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사실 듣는 사람의 감정들이 올라오면 엄마인 자신의 입장에서 하게 되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딸인 화자의 말을 그대로 ‘경청’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 말이나 행동에 대한 엄마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을 텐데. 그리고 그 바탕에는 사랑과 신뢰가 있어야 했을 텐데, 가장 기본인 '경청'을 하지 않고 했던 서로에게 지적은 사랑과 관심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비난이었다. 서로를 그냥 너무 믿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 서로 각자의 삶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일까.


꼭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궤도를 수정할 필요는 없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삶이 있다. 그래서 사랑이 기반이 되는 가족관계가 아닌 상황에서의 상담은 청자인 상담사의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관계가 서로 좋은 상태에서 이야기해야 상대방이 들을 것이므로 내담자와의 관계 형성 (rapport)이 중요하다. 내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경청하는 게 상대방을 위해서라는 걸 느껴지게 해야 한다. '내가 널 생각해서..' 라고 사족을 달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겸손하게 가야 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지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덜 폭력스러울 것 같다.


중동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던데, "침묵보다 못한 말이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 그러나 말하기 좋아하고 오지랖 넓은 정 많은 한국인은, 가끔 참을 수 없이 폭력적이다. 상대방이 나를 믿고 이야기할 때는 더 가슴 깊이 공감하며 들어주어야 한다. 끝까지 감정 섞인 말들을 다 들어주고 나서, 그 표현들을 지지, 수용한 다음 나의 의견을 말한다. 누구든 자기 가슴속에 터트리고 싶은 뇌관들이 있다.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그를 수용하며, '피드백'을 주려는 행위는 비로소 내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들을 말할 때, 나의 감정들에 솔직하게, 도망가지 말고 나 자신을 마주 봐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점에서 내가 스스로 논리적이고 강해져야 지난 날 내 안에서 상처 받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 상황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아직도 네 마음은 엄마 때문에 아프구나’라고 자각하며 치유해 주어야, 현실에서의 엄마와 나도 이상적인 관계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행위는 모두 '내 마음 알아차려주기'의 일환이다. 얼마나 더 실패하고 좌절하며 눈물을 빼야 하는걸까 주저앉다가도, 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나 자신을 잃고 살 것 같기에 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내 인생 대부분 나는 아팠다. 내가 나인 게 부정당하는 일상 다반사가 이뤄진 것은 다름 아닌 나의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었기에. 만약 이런 부분들을 내가 미리 알고 고쳤다면, 나는 진정 나를 사랑했을까. 그제야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누구인 줄 모르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덫에 빠졌던 거구나. 그냥 나를 인정하고 나의 강함과 약함을 받아들였더라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않고, 내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했더라면, 나를 바로 봤더라면. 나도 나의 가족들도 아프지 않고 좀 더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직면하는 용기는 내가 가진 미덕이다. 솔직함은 나의 특성이자 무기이다. 내가 나의 감정들을 인정하고 나면, 괜찮다. 언제든 가장 늦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다시 시작하면 된다. 회복탄력성은 불확실한 지금을 사는 나에게 가장 큰 자산인 것이다. 행복의 열쇠는 지금, 여기를 사는 내 안에 있다.


컴퓨터 드라이브에 남아있던 몇 년 전의 글로 갈무리 한다.



그냥 덩그러니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울지도 못하고

아픈 곳 여기저기 약만 먹는

그렇게 마음 다친 바보 같은

그런 내가 덩그러니 있었다


언제나 이게 끝날까

언제가 되어서야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열심히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잡을 수 없는 꿈을 붙잡고

그게 꿈인지도 모르는 채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나는 아직

아직.. 아직 아니야

아직 내 안에 게워낼 것들이 남아 있는데

그게 뭔가 반짝거릴 눈물 같은 것

그러나 계속 남을 무엇인가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내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저 무기력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떤 일일까.

내면에 귀 기울여

너를 사랑해

네가 진짜 원하는 걸 해



이전 07화삶에서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