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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Sep 23. 2024

왜 도망만 치고 있었던 걸까

인연을 지키기 위한 용기 혹은 비겁함 

누구나 살면서 후회했던 순간들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그 순간들이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후회로 남는지 아닌지는 그 순간들에 적절히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때마다 그 정서표현을 했는지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감정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빙산의 일각'이란 표현과 딱 맞아떨어진다. 그 순간에 미처 터트리지 못하고 마음속 심연 아래 빙산처럼 숨어있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 비슷한 말을 하는 상대를 만났을 때,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감정들이 다시금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 감정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모멸감, 모욕감, 분노.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나왔을 모른 감정들의 총칭이랄까. 표현해 버릇하지 않아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일들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분명 내가 후회한 순간들엔 쓸데없이 '괜찮은 척' 자존심을 지키던 내가 있었다. 누가 내게 함부로 말을 해도 한구석에서 삭히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었다는 이유로 하나부터 열까지 상대에게 맞춰주던 내가 있었다. 그 상대는 내가 그의 열개의 부탁을 들어준 뒤 열한 번째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나를 떠났다. 또 아주 매운 걸 못 먹는 나지만 친한 일행이 마라탕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쭈볏쭈볏 따라나서는 내가 있었다. 거기서 혼자 튀게 다른 걸 먹겠다고 하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는 살찌는 거라며 나를 놀리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나만 맞춰주면 되기라는 생각에 화장실에서 볼일 다 못 마친 사람처럼 어정쩡한 마음으로 괜찮은 척 웃었다. 그러고 나선 배탈이 나서 실제로 화장실에 오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은 자라면서 비일비재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괜찮아야만 했던 아이니까 다른 방법을 몰랐다고 하기엔 경험도 나이도 이제 많이 쌓였다. 하지만 친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일수록, 너무 편해진 나머지 나를 막 대하기 시작할 때, 나는 거기에 대고 화내고 소리치는 법을 몰랐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고, 상대가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나이가 들어서 이게 그렇게 큰 후회로 남을 줄 몰랐다. 왜냐하면 결국 그런 인연을 견디지 못한 내가 스스로 단단해지며 그들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헤어질 인연이었다면, 그 인연들을 지키기 위해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를 택할 것을 그랬다. 투박하기는 해도 너랑 더 마음 편히 잘 지내보고 싶다는 내 진심을 표현해 보긴 할 걸 그랬다. 그 이후의 선택은 상대방에게 맡기면 되는 거였는데. 나는 늘 한 발자국 더 가서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한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때 그 순간에, 그냥 잠깐 창피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걸 용기 내어 말해 보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나와 동시대에 교육받고 자란 세대중에는 이런 정서를 교감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도 나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단단해지는 여정을 지나고 있길 바란다.  결국, 내게 왔던 모든 이들이 참담함을 느끼며 떠나게 한 건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들이 후회가 된다면, 이제부터는 좀 더 솔직해지기로 한다. 


나중에 생이 끝나 가며 눈감을 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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