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이라는 말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를 나온다고 사장님께 보고했을 때, 그분이 하셨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 씨줄과 날줄을 엮어가며 살 각오인 건가요, 서율 씨'
그분은 야간 대학원을 가겠다는 생각으로 비서직에 지원한 나를 굳이 연구개발 부서에 재배치하신 분이기도 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전혀 모르던 분야에 들어가서 배워보라는 뜻이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었다. 물론 입사 통보 후 보직 변경에 대해 선택권은 지원자에게 있다고 보지만, 그때의 나는 절실히 직업이 필요했다. 남들이 대부분 일을 하는 9시부터 6시까지 할 수 있는 전일제의 일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서에서 8개월 정도 일하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너무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는 걸. 마음을 붙여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날아든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생이 그렇게 송두리째 바뀌었다.
싱가포르 공항에 내린 순간, 두 사람이 나를 맞아 주었다. 의심이 많았던 나는 미리 나를 뽑아준 부서의 장인 여자 상사와, 미리 방을 구했던 집의 주인에게 두 분 다 공항에 나와 줄 것을 요청했었다. 여자 부서장은 자신의 가족과 나와서 나를 맞아주었고, 방 세 들어 살 집주인은 자신의 친구인 여자 중개사를 데리고 나와 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집주인과 중개인과 셋이서 싱가포르의 야외 푸드코트인 호커(hawker) 센터에 처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솔직히 말하면 위생은 별로였다. 테이블은 휴지로 닦아야 하고 여기저기 새들이 음식 찌꺼기를 쪼아 먹으러 다녔다. 홍콩에서도 먹어 본 것 같은 볶음 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접시를 치우려니까, 집주인이 내 손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여기서 근무하는 청소부들의 일을 뺏어가지 말라고. 주변을 돌아보니까, 60-70대는 돼 보이는 노인들이 푸드코트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조금 놀랐다. 가성비 때문에 자주 갔던 패스트푸드 점에서도, 어디에서도 연배가 되시는 분들이 일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 곳이 싱가포르였다.
처음에는 직장에 적응하는 것보다 일상과 친해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잘 모르는 동네에서 식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옷 세탁은 어떻게 해야 하고, 월급 통장은 어디에 개설해야 하는지 등등.
집주인은 집 관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좋았지만 요리를 하려고 가스레인지를 켜면 어디선가 바퀴벌레들이 날아들었다. 야외 푸드코트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비위가 얼마나 좋은지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집에 같이 세 들어 사는 대만인 여자, 집주인의 아들과 셋이 돌아가면서 같은 세탁기를 썼다. 그 옷을 말리는 건 더 큰 일이었는데 보통 싱가포르의 임대주택에는 한국에서처럼 돌출된 발코니나 빨래를 널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예전에 시장의 포목점 같은데 가면 천장에 옷을 걸어 전시하는 긴 봉에다가 빨래를 널어 식탁 위에 있는 공간 위에 걸어야 했다. 침대보 같은 걸 빠는 건 그래서 포기했다. 그 시절에 방세를 내고 저축이라는 걸 좀 하려면, 평일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20 싱달러 (그 당시 한화 약 16000원) 정도였다. 일본에 가서 공부했을 때처럼 배가 고파서 2천 원짜리 과자를 파는 데 가서 싸구려 과자와 초콜릿 같은 걸 사서 먹다가 금방 살이 올랐다. 처음 3개월 정도는, 가끔 공황장애 같은 게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과자를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과자 봉지를 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꼭 내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것들을 다 가져다 버렸다.
나에게 싱가포르에서 절약하는 법을 제일 많이 알려준 것은 직장에서 사귄 동료들이 아니라, 집주인의 중개인 친구였다. 그녀는 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사는 장소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일 수 있는 곳이 싱가포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와 자주 싱가포르의 명소들을 찾아다녔고, 로컬 음식이나 문화를 배웠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한 번도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서로 챙겨주는 사람이 친구지, 나이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도 배웠다. 내가 이곳의 첫 직장에서 일을 배우면서 치이고 힘들 때, 회사에서 야근을 하면서 밤 11시에 무서워서 벌벌 떨 때 -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 부서에는 귀신 목격설이 꽤 있었다-, 싱가포르에 와서 처음 만난 남자친구랑 헤어졌을 때, 그녀는 늘 곁에 있어주었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다 자란 어른이라고 자부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저 어린애였던 것 같다. 울면서 한 밤중에 전화해도 나를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참 마음 따뜻해지는 일이다. 쉽게 인간관계에 기대지 말자고 하면서도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내가 있던 부서의 최대 클라이언트도 커피 회사였고, 나는 하루에 커피를 세 잔은 마시는 사람이었다. 나는 로컬 커피숍에 가서 -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Yakun kaya toast 같은 - 설탕프림 없는 로컬 커피를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Kopi O Kosong이라고 했다. Kosong은 말레이어로 비어있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O는 black, Kopi는 Coffee였다. 여기서는 로컬 커피 배전을 할 때 마가린이랑 설탕 같은 걸 같이 넣고 볶아서 원두에 그 결정들이 달라붙어서 따로 설탕을 넣지 않더라도 달달하고 진한 강배전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Kopi는 다양한 베리에이션이 가능해지는데, Kopi C (연유랑 설탕을 넣은 커피) Kopi Siew Dai (설탕을 좀 덜 넣은 커피) 등 융드립으로 뽑아내는 커피로 다양한 맛들을 펼쳐냈다. 그리고 이 커피는 싱가포르 국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일부였다. 아침이면 봉지에 뜨거운 Kopi를 사서 출근하는 이들, 점심 먹고는 꼭 더운데도 Kopi를 마시는 이들, 알면 알 수록 이들의 커피와 차 문화 속에는 말레이시아의 정서가 묻어 있었다. 당연히,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해 나온 국가였으니까.
싱가포르의 국가는 Majurah Singapura라고 하는 말레이어 제목이고, '앞으로 나아가라 싱가포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싱가포르는 섬 국가여서 자신들이 스스로 산업을 일궈나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단다. 내가 도착한 2013년은 싱가포르의 48번째 독립기념일이었으니, 매우 젊은 국가였던 것이다. 리콴유 전 수상은 이곳을 나무들이 가득한 정원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가가치 산업으로 관광지를 발전시켰고, 말라카 해협에 위치한 이점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를 잇는 최대의 환적항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물류기업들의 아태평양 사무실이 모두 위치해 있었던 거였다.
싱가포르는 절대적으로, 외국인 노동인구가 없으면 필요한 인력을 모두 채우기 어렵다. 그래서 워킹 비자 등급을 세 가지로 나눈 WP (건설, 3D 업종 등) SP(서비스직) EP (전문직)로 분류해 제공하며 각 비자급수별로 혜택과 차별이 나뉜다. 나의 첫 시작은 SP였다. 한국에서도 외국계 위주로 회사를 다녀서 하루 종일 영어로 근무하는 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것 또한 몇 달 동안은 큰 스트레스였다. 싱가포르 인들은 아주 특이한 영어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레이, 인디언, 중국어를 섞은 Singlish를 쓴다. 그래서 지금 내 영어 발음은 한국에서 있었을 때가 훨씬 더 '프로'다웠다.
로컬 커피숍에서 회사의 매뉴얼을 읽으며 주말을 보냈던 싱가포르 초창기 나날들은 나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맨땅에 헤딩하고 다시 솟아오를 일만 남았다는 설렘 말이다. 참 이상도 했다. 한국에서도 다른 부서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참 싫었는데, 해외에 나와서 전혀 모르던 문화 속에 적응해 나가며 그걸 재미있어하는 내 모습이 말이다. 얻은 것이 있다면 잃은 것도 있겠지만, 나는 새로운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모르던 나의 잠재력과 약점들을 발견해 나가면서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은 여러 가지로 엎치락뒤치락 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