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모르던 나날들
주머니, 지갑, 그리고 저금통까지 탈탈 털어도 100원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어서 그래도 통장에 몇십만 원 없었던 적은 없었는데 막상 수중에 한 푼도 없으니까 사람이 벼랑 끝에 내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집에 살고 있기는 했지만 용돈을 받지 않은지는 참 오래된 시점이었고, 직장을 다니다 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손을 벌리지 못했다. 나는 그때부터 방을 정리해서 중고 시장에 팔 만한 것들을 추려 냈다. 가방, 음반, 책 등이 그래도 몇 개 팔렸다. 귀금속은 몇 개 없던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금목걸이랑 귀걸이를 팔 때까지도 시간이 좀 걸렸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였다.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 먹고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그 나이가 아직 어리며 충분히 시작해 볼 수 있는 나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그때까지 내 삶에 큰 역할을 주지 않던, 몇몇 어른들의 조언 덕분이었다.
커피 프랜차이즈점에서 일한 뒤 몇 달 후, 힘든 일들에 대해 다시 잔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상담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고 녹취록을 몇 년 후에도 들을 수 있도록 상담사 선생님은 모두 녹음해 파일로 건네주셨다. 도서관에서 전일제로 다시 일하는 삶은 잠시였지만, 나에게 안락함을 선사해 주었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하루에 한두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웹서칭도 가능하게 해 준 환경. 여전히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혼자 점심을 먹으러 다니긴 했어도, 돈을 버는 안정적인 직장인의 삶이 공부를 하는 모험가의 삶보다 좋은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구심이 들었다. 뭐, 그래서 몇 달 뒤에 또 한 번 모험을 했다. 결과적으로 몇 개월 더 방황했고, 다시 커피 전문점, 꽃꽂이 창업반을 거쳐 지인의 소개로 한 외국계 회사에 취직했을 때는 스트레스로 10킬로그램쯤 불어있을 때였다. 그 정도 했으면 포기했을 것 같기도 한데, 뭔가 나에게 더 맞는 일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무슨 원동력으로 그렇게 열심히 헛다리를 짚었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었기에, 그녀의 조언으로 나는 싱가포르로 이직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그때의 나는, 집을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방 한편에 짐을 싸두기 시작했었다. 그러면서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렇게 한 군데 정착을 못하는 게 나라는 딸일 줄은, 자라면서 상상을 못 했으니까.
싱가포르에 있는 리쿠르터들과 화상 면접이라는 걸 보기 시작한 지 1년이 훨씬 지나서, 이제는 포기할 때쯤 되었을 무렵에, 나의 이력서를 가지고 있던 업계 1위 회사의 부서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장난 전화인 줄만 알았던, 그의 전화는, 지원했던 부서에 자리가 났으니 원하면 싱가포르에 와서 일을 하라는 제안이었다. 당시에 했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이직을 하려고 했던 찰나에, 언어 말고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업계에서 연락이 왔다는 건 그게 어디든, 내겐 선택권이 없어 보였다. 결혼이 아니라, 일을 하고자 했다면 말이다. 하루에 세 시간씩 걷고, 일주일에 다섯 번을 체육관에서 운동하면서 3주간을 열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놓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로 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스크가 컸지만 그만큼 나 혼자서 내 삶을 다져보려는 의지도 컸다. 그리고 그 믿음을 준 건 내가 취직하려는 회사 부서의 가장 큰 고객이 내가 일했던 그 해외 커피 프랜차이즈점이라는 거였다. 미국계 회사의 홍콩 리전과 면접을 보고, 그들이 내가 가진 경력에서 크게 쳐준 건 영어, 일어, 한국어라는 언어적인 것보다도, 지점에서 일을 해 본 바리스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제4자 물류대행업을 해 주는 그 부서에서는 회사가 싣고 나르는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오기를 희망했다고 클라이언트는 말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가방 하나와 잘 때 옆에 두는 인형 하나, 그리고 일본 하라주쿠 길거리에서 산 오래된 자명종 시계만 들고, 호기롭게 싱가포르 공항에 내렸다. 2013년 8월의 일이었고, 햇볕은 뜨거웠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홍콩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몇 달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도마뱀, 바퀴벌레, 그리고 여러 가지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생물들과 조우하면서 그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정도 나이를 먹고, 결혼도 안 하고, 왜 여기 있어?' 하는 식의 질문들에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내 결심이 늦게 선 것이 부끄러웠다. 이 길이 아니라면 되돌아가도 되는 시점이었던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내 힘으로 번 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내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