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절망의 끝은 희망과 맞닿아 있다

by 장서율

*2018년 영화 칼럼으로 발행한 글을 각색했음을 밝힙니다*


그림으로 가까운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타로 카드 중에 ‘텐 소드 (10 swords)’라는 카드가 있다. 한 남자가 동트기 전 새벽 바닷가에서, 칼 10개를 맞고 쓰러져 있는 그림의, 다소 과격해 보이는 카드이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고통이 크지만, 아침이 밝아 오니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그런 뜻으로, 한 사이클이 다 채워진 10개는 다시 공(0)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마저 가지고 있다. 죽음 같은 고통 뒤의 새로운 탄생,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불교관과도 상통하는 걸 보면 동서양 통틀어서, 삶은 고난과 행복 사이의 “파도타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타로 카드를 배웠던 것은 대학원을 졸업할 때 즈음 정신분석에 기반한 공부를 하고 상담을 하고 싶은 꿈이 생겼을 때, 나도 타인도 잘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심지어 나의 논문 주제 또한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괴리가 적을수록 주관적 안녕감 ( = subjective wellbeing의 번역. 고로, 내가 느끼는 삶의 주체적인 행복감)을 측정한 것이었으니, 타로 카드에서 힌트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 시절에 나는 이미 텐 소드의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그게 지나고 나 보니 장장 12년 정도 지속된 것 같다. 하지만 돌아보니, 이유 없는 고난은 업었다. 절대자는 나를 갈고닦아 어떤 그릇으로 쓰시려고 하는 건지.


여기 영화 속 진절머리 나는 고난의 삶을 사는 남자가 있다. 영화 속 경유 (이진욱 분) 에게는 착 가라앉은 겨울, 비 내린 후의 공기 같은 냄새가 난다. 대리 운전을 하고 있고, 지금 여자 친구와는 결혼하고 싶지만 특정한 직업이 없어서 용기 내지 못한 채, 그녀의 집에 몇 년간 얹혀사는 그는 사실 소설가를 꿈꿨었다. ‘노인과 바다’의 모든 번역본을 사서 볼 정도로 열정적인 그였지만, 그를 내리누르는 실패와 좌절 앞에 지금은 발기부전까지 왔다. 한국은 그렇게 ‘꿈이라는 것’에 야박한 사회였던가 싶을 만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일 조차도, 소설을 써왔다는 사연 하나에 거절당하기 일쑤다. 호랑이가 동물원 우리를 탈출했다는 뉴스가 나온 날, 경유는 부모님이 방문하는 주말 동안 여자 친구 집에서 잠시 나와야만 했다. 대리운전 건으로 운전해 간 삼청각에서 그는 대학시절의 연인 유정 (고현정 분)을 손님으로 만나게 된다. 함께 소설을 공부했던 그들이었지만, 유정은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그는, 꿈을 포기하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라 초라할 따름이다.


첫 재회에서 결혼을 했다고 말했던 유정은 그러나, 다음번의 우연 같은 만남에서 경유에게 그 말은 얼결에 나온 말이라고 하면서,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와중에 주말 동안 여자 친구는 경유와 헤어질 생각으로 몰래 이사를 가버리고, 큰 마음먹고 여자 친구 부모님에게 결혼에 대한 청을 드리려고 찾아간 경유는 큰 상처를 받는다. 오갈 데 없어진 경유가 친구 집에 찾아가 그를 붙잡고 울면서, 인사 선물로 사서 들고 간 한우를 구워 먹자고, 낮게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는 모습은 마치 상처 받은 짐승 같다. 우리를 탈출해 자신이 모르던 어떤 새로운 세상에서 상처 받은 호랑이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유정을 만나기 시작한 경유는 오갈 데가 없었고, 거기에 소설을 쓰는 데 영감을 달라는 그녀의 청에 그녀 집에 머물게 된다.


유정은 첫 소설로 크게 성공했으나 몇 해 동안 한 글자도 쓸 수 없어 매일 술을 마시는 그런,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 속의 호랑이 같은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 처음에 유정이 보이는 행동은 경유와 보낸 순수한 시절의 꿈을 찾기 위해서처럼 보였지만, 종내 그녀는 이전에 경유가 썼던 소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면 안 되겠냐는 말을 던진다. ‘어차피 그냥 둘 거면’, 이라는 토를 달면서 내키지 않으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던지는 유정 앞에 경유는 마침내 그동안 쌓아만 두었던, 자신의 이상과 매캐한 현실 사이 부조리에서 쌓여온 모든 화를 폭발시키게 된다. 성공한 듯 보였지만 자신 안에서 갇혀서 곪아가는 유정과,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나 자신은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유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대사가 극도로 적은 영화이지만 각 장면마다 보이는 섬세한 장면의 묘사는, 두 사람의 성격을 구체적인 곳까지 잘 보여주고 있다. 관객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게는 긴 겨울 끝내는 시원한 한 줄기 바람 같은 그런 영화였다.


인생의 가장 아래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 깨달음 끝 내면의 각성으로 다시 높은 곳까지 뛰어오르려는 듯이, 경유는 마침내 다시 펜과 종이를 잡는다. 그 앞에는 그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우리를 탈출한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이 쓴 호랑이 가면이 있을 뿐이었다. 공포는 용기를 잃었던 자에게 실체조차 알 수 없이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지만, 알고 보니 허상일 뿐이었다는 그런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았다. 삶과 꿈에 대한 각성 앞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 짓는 경유 앞에서 영화는 서서히 암전 되지만, 긴 여운은 남는다. 그가 글로써 성공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간절하게 그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길에서 얻는 “삶에의 용기”, 그것이다.


경유 역의 배우 ‘이진욱’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가 마침, 자신이 성폭행을 했다는 의혹으로 고통받고 있을 무렵 (의혹은 상대 여성의 무고죄 판결로 종료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영화 속 경유와 같이 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히 연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내내 경유의 눈동자는 대사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유는 영화 속에서 소설가라고 하기보다는 시인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시인은, 내가 어렸을 때 그토록 꿈꿨던 시인의 모습은 제대로 현실 속에 안주해서 살 수 없다고 들었다. 그의 이상이 너무 높고 마음은 또 너무 순수해서, 상처 받고 짓밟히는 보통 사람의 삶은 살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시대도, 나도, 내 생각도 변했다. 영화 속 경유가 그러하듯, 계속 꿈을 꾸면서 그 방향으로 행동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을 잘 알고 목표하고 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그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 타로 점에서 ‘텐 소드’ 카드는 이제 안녕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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