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rcism of Emily Rose

시련을 주시는 건 아마도 절대자의 힘

by 장서율


영화 이야기 전에 두 가지를 먼저 밝혀둔다. 첫째, 나는 호러 영화를 좋아한다. 공포를 느끼는 인간은 가장 인간 본성에 가까운, 숨기지 못하고 거짓말하지 못하는 행동양식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포나 트라우마로 유발된 신경증 따위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약이나 치료도 중요하겠지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정서적인 도움 (support)라고 믿기 때문에 호러 영화는 내게 있어 매우 정직하다. 그리고 그런 가치에 기반한 정서적인 도움에 기대고, 믿고 싶게 만든다.



둘째, 나는 불자다. 모태 신앙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하는데 불교 신자인 나도 태어날 때부터 친외가가 다 불교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향 냄새를 맡고 자랐다. 심지어 이름에도 불교에서 기인한 한자를 쓰는 나는 가위에라도 눌릴라치면 자동반사적으로 호신 진언과 광명진언을 왼다. 그리고 깨면 유튜브로 불경을 찾아 듣는다.








buddha.jpg?type=w1 봉은사 목 삼존불상(석가불, 가섭 존자, 아난존자) (奉恩寺 木 三尊佛像(釋迦佛, 迦葉尊者, 阿難尊者) 사진출처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



믿음은 그런 것이다. 내 안에 가장 원초적인 것에 맞닿아있고, 초현실적인 가치라도 정말 나 자신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초월적인 힘, 또는 깨달음, 또는 경험. 나는 종교의 가치를 그런 것에 두고 싶다.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가치, 내가 가고자 하는 믿음의 저편. 그리하여 나도 조금은 구원받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고자 하는 발버둥. 힘이 들 때는 부처님 전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며 기도했던 적도, 버스 타고 혼자서 먼 절을 찾아다녔던 적도, 너무 일이 풀리지 않아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절에서 제를 지낼 때 내 곁을 지나가는 '인간의 것이 아닐 만큼 차가운 기운'을 느껴본 적도 있었다. 종교는 그렇게 내 주위에 공기처럼 존재했고 내가 나아지는 방법은 나를 어지럽게 하는 것들을 게워내서 다시 맑은 정신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의 성향대로 지금은 어느 정도 내 안의 평정심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 포스트를 통해 나는 기독교/개신교/천주교 그 무엇 하나 반박할 생각이 없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도 명시된 인간 개개인의 고유권한이기에.



영화 속 에밀리는 독실한 교구 신자였다. 무어 신부는 교구에서의 그녀를 신앙이 깊고 영민하며 성인이 될 수 있을 재목으로 보았고, 부모님은 그녀가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에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던 그녀는 '그것'과 조우하고 '그것'에 몸을 지배당한다. 초현실적인,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말이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Demons'라고 부르며, 그 반대 개념은 신 (God)을 수호하는 'Angels' 일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잠식당하는 순간의 공포를 느끼며 에밀리는 구원을 요청한다. 자신의 남자 친구 제임스가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만 영적인 구원이 필요했던 그녀에게는 역부족이다.




church.jpg?type=w1 자신의 영혼이 잠식당하는 순간 교회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에밀리



무어 신부와 에밀리, 에밀리의 가족들은 퇴마의식인 Exorcism에 동의하고 의식을 치르지만, 결과적으로 에밀리는 사망하고,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무어 신부의 Negligence homicide (방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살인)라고 검찰은 그를 감옥에 보낸다. 교구는 변호사 에린을 고용해 그를 석방시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에린은 무어 신부와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종교와 신앙, 인류애적인 측면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영적인 싸움이 개입된 재판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방해와, 증인의 죽음 등으로 점철되지만, 에린은 자신이 믿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계시(sign)를 영화적 장치로 보여주지만 뭐랄까, 믿음을 향해 가는 그녀의 영화 속 행보는 묵직하고 아름답다. 미국의 재판에서 변호사는 언어의 연금술사이자 연극배우이며 임기응변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야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결국 믿음과 신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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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장에서, 변호사 에린 브루너 역을 맡은 배우 로라 리니.



이 영화는 앙헬리스 미헬이라는 독일 이름의 여성의 엑소시즘 케이스에 대략 기반해 있다고 한다. (

https://en.wikipedia.org/wiki/Anneliese_Michel) 명민한 얼굴을 한 그녀는 퇴마 의식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을, 영화 속의 비유로 보자면, '신은 그녀를 크게 쓰시려고, 그녀를 통해 신을 입증하시려고, 그녀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셨다'. 비약일지 모르나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그릇이 큰 사람이 되려면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사람을 다스리는 건 시간이라고 흔히들 말하지 않나.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 들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큰 입지를 지낸 사람들에게 성장통이나 시련이 없었을까. 흔한 예로 조앤 K 롤링의 생활고와 아이에 대한 절박함이 위대한 해리포터를 썼다고 하지 않나. 사람을 크게 쓰시려고 절대적인 존재가 시련을 주신다는 걸 나는 믿는다. 인생은 켜켜이 겹겹이 피 땀 눈물 꾸덕한 버터가 발린 크로와상 같아서 그런 '눈물 젖은 빵'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 괴테가 좋아서 이 단어를 어릴 때 알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했다)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의 평화로움과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그렇다.



당신은 살면서 눈물 젖은 빵을 언제 먹어봤나요?

당신의 시련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시련을 돌파했던 신념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사랑이든, 가족이든, 종교이든, 당신을 지탱했던 그 무엇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리고 그건 아직 당신 안에 존재하나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질문들이 내 가슴속에 와서 박혔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의 시련을 자초한 건 나의 호승심과, 호기심과, 자만과, 반항심이었지만, 이제와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된 것은 그 절대적인 누군가가 내게 앞으로는 좀 평탄하게 살라고 말씀해 주시려고, 그 말씀 듣게 하시려고 가시밭길 걷게 하신 건 아니었을까. 역시 나는, 이런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는 호러 영화가 좋다.



며칠 전에 오랜만에 가위에 눌렸다. 내 침실은 셰어 하우스의 이층 문간방인데, 새벽 세시쯤 되어 누가 문고리를 엄청 돌리는 것 (나는 방에 있을 때는 늘 문을 안에서 잠가 둔다)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일본어로 대답하는데 이 셰어 하우스에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꿈속에서도 소름을 느끼며 한 사람을 보내고 나니, 두 사람이 연달아 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안에서 열쇠를 돌리는 걸쇠 부분을 꼭 움켜잡고 나는 꿈에서 엄청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꺼져! 사라져!라는 염원을 담아 엄청 크게 소리 질렀고 그 순간 가위눌림에서 해제되었다. 꿈에서 깨고 난 새벽 다섯 시 즈음.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건 별로 좋은 꿈은 아닌 듯 하지만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을 보면) 소리를 질러 그것들을 쫓아 보낸 건 내 안에 힘이 모였다는 반증인 것 같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심약해지면 이런 꿈들을 자주 꿨었다. 오랜만의 가위눌림을 겪고도 호러 영화를 보고 또 기도를 하고 잠드는 나. 괴이하다면 괴이하다.



amazon.jpg?type=w1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존재의 근원과 시련의 의미에 대해 묻는 장면이자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시각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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