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t Pas Mal

été 85/ 썸머 85

by 장서율

I am dying, forever crying, to be with you, who can say.

To be near you, to be free.. can you hear me, can you hear me.

-Rod Stewart 'Sailing'


이 곡이 이렇게 좋은 노래였나. 먹먹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첫사랑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의식과, 장면이 이 노래와 오버랩될 것이다.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는 최근에 프랑스 영화 페스티벌이랑 한국영화 페스티벌을 비슷한 시기에 개최했다. 또 계절이 바뀌면 독일 영화제, 이스라엘 영화제 등등 재미있는 영화들이 많이 나온다. 너무 좋은 건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굵직한 영화들 모두 현지에서 개봉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6년째 몸담고 있는 회사가 프랑스계이므로, 회사에서 이 나라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스폰서를 하기에 VIP들에게 티켓들을 배부하라는 지령(?)을 받고 웹사이트를 찾아보다가, 이 영화 포스터에 꽂혀 버린 것이다. 십 년쯤 전에 본 '8명의 여인들 (8 femmes)'의 감독이랑 같은 프랑소와 오종이 만든 감독이라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영화표를 결제하고, 마스크 쓰고 무릎 담요를 들고 영화관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찾는 이 도시의 독립 영화관 격인 이 곳에서, 반가운 포스터들이 보여서 찍어 봤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어떤 여성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전 좋아서요.

영화관 입구에 자리한 포스터. 느낌 오시는가요. 아페롤 스피릿 한 잔 들고 불어 하는 사람처럼 당당히 입장!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엘리베이터 옆에 살포시 놓인 영화 '소리도 없이'의 영어 포스터. 이것도 보고 싶었는데 ㅜ



















노르망디의 해변이 영화의 배경이라고 한다. 우리 지금 보스가 노르망디 어디 위쯤에서 태어났다고 하셨는데. 보트를 타고 일광욕을 즐기던 열여섯 살 Alexis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그의 극 중 이름보다, 애칭인 little bunny가 더 빨리 기억났다. 리버 피닉스와 제임스 딘을 오묘하게 섞어 놓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소년이 아닌 소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싶게 열정적인 첫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고, 무엇보다 백옥처럼 하얀 엉덩이가 생각난다. 배우 이름은 펠릭스 르페브르. 르페브르는 내 지난번 보스의 성이다.)는 갑자기 밀려오는 먹구름에 당황해서 그만 물속으로 빠지고 마는데, 도와 달라고 외치는 순간에 David (벤자민 부아쟁이라는 배우. 엄청나게 압도당했다, 그의 표정과 연기에. 그냥 그는 '다비드' 그 자체였다) 이 나타나 그를 구한다. 물에 젖은 Alex는 David의 집으로 향해 목욕을 하고 옷을 얻어 입으며 인연이 시작된다. 굳이 욕조 속으로 Alex를 밀어 넣는 David의 미망인 어머니는 굳이 굳이 Alex를 발가벗기며 이렇게 말한다. 복숭아 같은 엉덩이가 화면에 잡히지만 어머니는 그의 앞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Your mother must be proud!' 관객 모두가 크게 웃는다.


영화는 약간의 액자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David과 Alex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내러티브가 등장한다. 글을 쓰는 Alex는 죽음에 집착하고, David는 죽음으로 항해사였던 아버지를 빼앗겼다. 타이프라이터로 자신과 David의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쉬임 없이 써나가는 Alex.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에서 만난 둘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섭게 서로에게 돌진한다. 나도 첫사랑이란 걸 할 때 주변에서 자주 했던 말이 글을 쓰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첫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라고. 글쎄, 많은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싶다.


퀴어 영화이다 보니 섹슈얼한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장면들의 묘사는 그냥 사랑하는 두 사람의 행위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담백함과, 아름다움과, 열정이 있다. Alex가 쓰길 'that was the most beautiful night I've ever had'라고 묘사한 문 너머 둘의 초야는, 내레이션 만으로도, 글 만으로도 상상이 되었다. 영화의 트레일러에도 (링크 참조 : http://www.cine21.com/db/person/info/?person_id=11208 한국에서도 12월에 개봉한다) 나왔듯이, 6주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늘 함께 있고, 사랑한다. David의 'Suzuki' 바이크 등 뒤에 타고 그를 꼭 껴안으며 바람을 맞는 Alex의 행복한 모습은, 노을 지는 석양과 바닷길을 따라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둘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부모님, 그리고 영국인 여성 Kate와 길에서 만난 남자 1(이름을 말했었을 수도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이다.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그들의 관계는 영화 끝 무렵에 알 수 있다. 재치 넘치는 오종 감독이 Kate로 하여금 Alex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했는지를 잘 살펴보면, Alex의 전지적 시점에서 Kate의 관찰자 시점으로 옮겨가는 내용으로 영화가 완성되는 것 같다.


Little bunny와 David는 질투와 애정 혹은 상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무섭게 다투게 된다. 나는 묘지 씬 빼고 이 장면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다. 촘촘히 잘 짜인 감정의 틀 속에서, 진짜로 사랑했던 것 같은 두 배우는 서로의 방식으로 '사랑해'를 외침에 다름 아니다. 심약하고 열정적인 David의 행동으로 인해, 파국이 오지만, 이별을 하는 Alex의 ritual(의식)은 약간의 그로테스크함도 있지만 (역시 프랑소와 오종 감독), 납득이 되고, 아름답고, 또 아프게 빛난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별의 몸짓이 나오는 장면의 배경 음악이 Rod Stewart의 'Sailing'이다. 이 노래는 가장 아름다웠던 둘의 시간에 등장한 배경 음악이기도 하다.


laboom.jpg 아마 거의 모든 관객들이 알아차리셨을, '라붐'의 오마주? 이 장면이 나오고 나는 크게 웃었다.


누구나 아프게 지난 삶의 구간들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 첫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 혹은 극단적으로 죽음, 이혼, 사별 기타 등등. 그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이나 기간 또한 (혹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그냥 인정하고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두려움이나 슬픔이라는 게 인정하고 나면 내가 느끼던 것보다 '괜찮구나' '작구나' 싶을 수도 있어서)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최근에 구구절절 내가 브런치에 썼던 나의 상처들을 돌아보건대, 글을 쓰면서 나는 정말 완전히 솔직했을까? 미사여구로 꾸미고, 나만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려 했던 건 아닐까?라는 물음들이 나를 콕콕 찌른다. 영화에서의 litte bunny는 둘의 이야기를 적으며 상실을 이겨낸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스로 글로 인한 'healing'을 인지한다.


최근에 다른 분들의 블로그를 읽다가 이런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717147 ; 상실 수업) 보통은 상실을 겪으면 부정과 그 상대에 대한 분노, 그리고 타협 (인지부조화, 등등)을 지나 우울 (애도의 기간)을 거치면 수용 (받아들임) 이 오는데, 이 책에는 그 수용 이후에 대상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고 치면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미친 듯이 나를 좋아했으나, 참 많은 말의 칼로 나를 베었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결정적인 단점이나 관계의 틀어짐으로 이별했을 때, 아래와 같은 단계가 나올 법 하다. 하기의 예시는 나의 경우에서 써 봤다.


1)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를 왜곡하거나 혹은 왜 이런 연애에 시간을 낭비했나 등등의 부정

2) 왜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나에 대한 분노, 그러고 나서

3) '어차피 이런저런 이유로 그 사람과는 행복하지 못했을 거야'라는 일종의 타협,

4) 이윽고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 우울감 (나는 이 구간이 제일 힘들었다)

5) 수용 (받아들임) 어차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질 거였어.. 그래도 사랑했잖아...

6) 의미 (그러나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이런 교훈을 주고 갔네? 그가 있었기에 나는 이제 삶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어, 내가 사랑할 때의 모습을 알 수 있어, 사람을 사랑하는 의미를 깨달았어.. 등등)


그 어떤 일들도 지나고 나면 시간이 다 상처에 약을 발라서 낫게 해 준다. 얼마나 덜 다치며, 좀 더 현명하고 생산적으로 이 구간을 통과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버스라는 거 꼭 타고 행선지에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 탔는데 아닌 거 같으면 운전사랑 실랑이해서 내리면 된다. 그게 가고 나면 또 한 대가 온다. 나중에 온 버스가 의외로 내가 가려는 행선지에 더 가까울 수도 있고, 내가 모르던 더 좋은 곳으로 좀 더 안락하게 나를 데려다 줄 수도 있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고, 인생은 모험이니까. 나는 지난 인생을 돌아보건대 늘 차선책이 나쁜 것은 아닌 plan B 인생을 살았다. 인생의 그 무엇에든 최선을 다해 봤다면, 나 자신에게 잔인하도록 솔직해져 봤다면,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미친 듯이 미워해도 봤다면, 차선책으로 우회해도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이것이 보들레르가 말한 시 '취하라'의 정수였을까.


Alex와 David의 행복한 장면에서 폴 베를렌(Paul Verlaine)의 랭보(Rimbaud)에 대한 연시를 읽는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내가 아는 폴 베를렌의 시 중에 가장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시는 '거리에 비 내리듯'이다. 교실에 갇혀 공부하다가 갑자기 헤어진 첫사랑 생각에 혼자 마구 울음을 터뜨린 단발머리 내게, 잘 모르던 반 친구가 슬쩍 노트에 적어 내 책상 위에 놓고 가 주었던 시. 그녀에게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거리에 비 내리듯 - 출처 : http://ch.yes24.com/Article/View/28862/ 원시 불어, 폴 베를렌

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눈물 내리네
이 울적함 무엇이기에
내 가슴 깊이 스며드나?

땅에 지붕 위에
오 포근한 빗소리여!
울울한 마음을 위한
오 비의 노래여!

내키는 것 없는 이 가슴에
까닭 없이 눈물 내리네
무어라고! 돌아선 것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이 없네.

가장 몹쓸 아픔은
웬일인지 모른다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가슴이 그리도 아프네!


C'est fini. (the end)


주 : C'est pas mal (not too bad, 영화에서 David가 Alex에게 옷을 골라입혀 주며 하는 대사. 사랑도 열정도 다 나쁘지 않았다. 상실에 대한 것조차도, 감독은 이런 감정을 담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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