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스테이크라니
한 밤에 써 본 서평 혹은 독후감
역시 오늘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서평을 올려보려고 한다. 서평이나 독후감이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한국의 오랜 친구들이 보내준 소설책 한 권과 손편지에 한 없이 기뻤던 연말의 어느 토요일.
사실 외국에 살면 종이책 신간을 읽는 게 많이 간절하다. 이메일과 폰 두 개에 오는 메시지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린 내 눈은 전자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종이책만이 가진 노스탤지어와 책을 읽어나가며 느끼는 건, 공감을 넘어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갈망이다. 자그마치 작가님 사인까지 들어간 책 실은 단숨에 몇 편을 읽었지만 여기에 대해 한 글자 써보기까진 꽤 걸렸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하정우의 지난 영화 필모그래피 가운데 'Never Forever'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사는 하정우 역의 남자는 사이드잡으로 정자 기증이 아닌 직접적 관계를 통해 불임 부부에게 축복(?)을 주는 그런 일을 한다. 영화 전체의 대사가 영어였고 하정우라는 배우의 영어 대사는 나름 투박하고 투명한 느낌이 있었고 상대역의 배우는 꽤 유명한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한 여성이었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면서도 아이를 가지려고 애썼던 것 같은 그녀... 는 이 낯선 동양 남자와의 몇 번 이어진 잠자리에 드라이한 자신의 공간에 꽃을 놓게 된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어 우연히 이어져 결실을 맺으며 끝난다.
한국에서의 상영 제목은 '두 번째 사랑'이었다.
네이버에서 찾은 사진. 베라 파미가는 컨저링 시리즈에도 나왔던 그 배우 2007년이라니 하정우 배우도 어렸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랑이 스테이크라니'의 첫 번째 옴니버스 이야기가 비슷한 소재의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레어 스테이크를 즐겨 먹던 나는 언젠가부터 웰던을 지향하게 되었다. 힘이 달리면 혼자서라도 식당에 가서 피가 뚝뚝 떨어지던 스테이크를 썰던 나는 그 시절 심각한 애정 결핍이었던 건 아닐까. 모든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에 끌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소설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정자를 제공하려 의뢰인을 만난 제임스는 그런 핏물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의뢰인을 안심시키고 그녀의 아내를 삼켜버린다. 소설 전반에 피 냄새와 아릿한 성관계의 후의 향이 넘쳐흐르는 것 같다.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내와 뭇 사내에게 살을 섞게 하는 남편은 서로의 욕망에 눈이 멀어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고, 육정이라는 것에 홀린 아내는 '스테이크처럼 생긴 검붉은 것'을 낳기에 이른다.
사랑은 헐벗고 지칠 수 있다 피 흘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원동력이 그렇게 피흘릴지라도 그 결과는 아름다워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의 공통된 욕망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 여자처럼'과 '종이비행기'를 읽었다. 전자에서는 집이라는 매개체와 내 여인의 동거인이라는 콘셉트에서 왠지 얼마 전에 본 영화 '남매의 여름밤' 이 생각났다. 집이라는 것에 얽힌 이야기, 사연, 동거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과 감정들. 거기에서 얻어지는 성장담이 영화에는 있었지만 소설에서 보이는 건 말 그대로의 '절망' 혹은 '구덩이 속에서의 공존' 같아서 갑갑하기도 했다. 표현들이 날것이었다. 내 여인의 동거인이 만든 짜장면을 생각하며 나도 짜장을 만들어봤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음식의 이미지와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나도 가만히 보면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긴 하다. 식욕이 남아있는 걸 보니 내 리비도는 아직 살아있구나.
'종이비행기'에서의 결말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여자가 가고 싶어 한 북해도에의 미련도 남자가 여자를 보내기 싫어한 이유도 내 안의 어떤 미련과 겹쳐져 어떤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외로움에 종이비행기를 접었다던 남자와 '한때는 내게도 꿈이 있었다는' 여자의 만남. 사랑을 잃고 사랑을 보내기 싫어서 서로의 몸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은 남자. 그 말로는 행복했을까. 육덕 지고 서글픈 네온사인 아래의 정사신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섹스도 결국은 외로움을 잊고 서로의 심연으로 파고들려는 행위의 정점이 아닐는지.
내가 최고로 마음에 들어서 몇 번 천천히 곱씹어가며 읽은 단편은 '도마뱀과 라오 커피'였다. 내가 살고 있는 동남아에도 사람들이 아침마다 마시는 로컬 커피 '코피'가 있다. 블랙으로 해달라고 안 하면 연유랑 설탕이 디폴트로 들어간다. 더 세게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코피 카오' , 약하게 해 달라는 말은 '코피 슈타이' , 아예 융으로 처음 내린 커피 원액을 달라고 주문하는 말도 있는데 잊어버렸다. 아마도 ' 코피 판페이딜로' 였던듯. 이 모든 단어는 말레이시아에서 근원 했으며 내가 아주 특이한 주문을 했을 때 커피점 아주머니는 '넌 외국인인데 왜 그런 단어를 아니?'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게 엊그제 같다. 나는 그렇게 무던히 이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융화되어 있지만 가끔 느끼는 서글픔과 쓸쓸함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내가 원래 있던 곳에서 느꼈던 이질감이나 외로움에 비하면 견딜만하다는 게 아이러니다.
아래 글을 위한 설명. 원두를 볶을때 마가린이랑 설탕을 넣어 같이 배전하면 추가로 설탕없이도 달큰 구수한 맛이 완성된다ㅡ 보통은 비닐 봉다리에 넣어서 테이크어웨이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기저에 그 외로움이 있어서 고요한 작가님이 그 숨 막히는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어서 너무 반가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은 살려고 여행을 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영혼의 소유자와 조우하기도 하지만 그 결말이 모두 해피엔딩인 건 아니다.
#발췌 - 페이지 181 '도마뱀과 라오 커피'
실제로 푸씨산에서 세 번이나 프랑스 여자를 만났다. 두 번까지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세 번이나 만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걸며 갈대로 만든 작은 케이지에 들어 있는 새를 보여 주었다. 푸씨싼 정상에서 새를 파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새가 사람들의 고통을 하늘 끝까지 가져간다고 했다. 한 아이에게 새 한 마리를 사서 그녀와 메콩강이 보이는 바위 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새를 날려 보냈다. 두 마리의 새가 그녀와 나의 고통을 아주 먼 곳으로 싣고 가기를 바라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그녀 역시 내가 갖고 있는 고통에 대해 묻지 않았다.../ 발췌 완
나는 위 문단의 은유가 너무 좋았다. 나에게도 날려버릴 새와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미 옆에 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그 혹은 그녀이기를 바라면서.
#발췌 - 페이지 195 '도마뱀과 라오 커피'
"난 목이 잘린 불상을 볼 때마다 그 얼굴이 어디 있을까 떠올렸어요. 그 얼굴을 찾아 얼굴을 숨기고 거리를 배회하는 불상의 모습도 떠올렸고요. 어쩌면 목이 없는 불상들은 나인지도 몰라요. 나 역시 당신 같은 여자를 찾아 얼굴을 숨기고 이곳을 돌아다녔으니까요. 물론 어느 밤에 그런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고요. 하지만 난 늘 막판에 돌아왔어요. 그럴 때마다 메콩강가에 멍하니 앉아 있었죠.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 생각했어요. 얼마나 많은 강물을 흘려보내야 진짜 나를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새를 날려 보내야 나의 고통이 사라지는지..."/ 발췌 완
이 글을 읽으면서 살려고 이 곳으로 오기 전 수많은 고민을 하며 걷던 집 앞 한강 옆 산책길이 생각났다. 추운 겨울에도 세 시간씩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질렀던 해외 취업. 나를 이곳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외로움과 가장 가까운 타인에 대한 환멸이었으나 실은 나는 알고 있었다. 훨씬 더 오래전에 벗어났어야 했음을.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를 감사할 수 있음을.
어느 바에서 본 삶의 모토. 심플하고 명확하다. 이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아래 글은 며칠 전 과거와의 이별을 다짐하며 나의 SNS에 남긴 글이다. 이제 그 편린들을 모아 나의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해본다ㅡ 그게 내가 받은 사랑과 지지에 대한 일말의 보은이라 믿는다.
휴대폰 속 노트를 살펴보다가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지나간 일은 모두 잘 된 일이다'
법륜 스님 하신 말씀
사람은 어떤 일이 지나고 나면
생각보다 자기 좋을 데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내가 그렇다. 그게 살기 편해서)
마음에 손을 얹고 물어보니 그렇다.
나는 지금의 내가 제일 좋다.
지금의 내가 제일 낫다.
많은 소용돌이를 지나서
지금의 내가 있다.
하여
지나간 모든 일은 모두
잘 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