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원래 디폴트로 외로웠던 사람인 거야?

드라마 '런 온'에서 발견한 명대사

by 장서율

연말 약속은 선택과 집중으로, 오늘도 모처럼 일 마치고 2시간이나 요가를 하고, 좀비처럼 자겠다고 집까지 걸어오는 도중 한 통의 전화로 긁어 부스럼이 된 나의 기분. 좋아하는 가수의 SNS에 등장한 연어 스테이크를 보고 슈퍼에 들러 연어와 대파와 피망을 샀다.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걸 굳이 밤 열 시에 구워 먹겠다고 부엌으로 향한다. 뭐든 손을 놀리지 않으면 또 침잠할 내 안의 어둠. 마치 평생 최면에 걸려 있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틱 하고 사인을 주면 다시 잠에 드는, 그런 몹쓸 주술에 걸린 것 같다.


국간장이랑 소금 후추 마늘 다진 것 그리고 대파에 식용유를 발라 마리네이드 한 연어 두 조각을 프라이팬에 올리고, 피망이랑 대파를 사이드로 굽는다. 버터를 아주 약간만 넣어 가수의 SNS처럼 겉바속촉으로 구워본다. 근데 전혀 즐겁지가 않고 마음이 무겁다. 슈퍼에서 장을 볼 때도 고기며 생선이며 나는 세일 안 하면 잘 안 산다. 관세 때문에 술값도 비싼 이 나라에서 또 캔 와인을 집어 들게 만드는 그녀의 한탄. 도와주고 싶으면 돈을 보내 달라는 그녀의 말. 햇수로 몇 년 째인지 이제 세는 것도 싫다. 부모님이니 용돈을 때 되면 보내드리지만 제발 바라건대 자발적으로 드리는 돈 말고는 요구당하기 싫은 내 마음이다.


'돈 좀 줘'라는 말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다. 그녀의 이런 말이 이제 무섭다. 그녀의 이야기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오늘의 두 번째 끼니인, 잘 구워진 연어를 곱씹으며 다짐한다. 나는 곧 죽어도, 마음 굳건히 먹고 그냥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야겠다. 나처럼 한국 땅에 미련 다 버리고 해외에서 살려는 좋은 사람 있으면 같이 살아도 좋겠다. 어디 가서든 살아도 좋겠다, 그 사람만 좋다면. 나는 안다. 나는 다시 그 땅에서 예전처럼 살지 못할 거라는 걸. 그냥 내 인생을 혼자 개척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올해 나의 다짐은 '외롭고 나약해지지 말자, 지금을 즐기자'였는데, 무심코 틀어둔 넷플릭스의 드라마 런 온 (Run on)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위로를 던지는 이 대사가 저리다. '고통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아픈 게 디폴트인 사람은 없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다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며 살며시 안아준다. 그러면서,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무딘 나 같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한 마디를 더 한다.


'이것도 뭔지 모르는 건 아니죠?' (여 : 오미주)

'위로' (남 : 기선겸)


국가대표 육상 선수인 남자주인공은 자신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모르면서 자랐다. 사랑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는 스토리인 것 같다. 남자 주인공의 엄마 역은 극 중에서 여배우다. 그녀는 엄마보다는 여배우가 더 잘 맞는 옷인 사람인 것 같다. 아마도 남자 주인공인 기선겸은 엄마의 부재와, 국회 의원인 아버지의 엄하고 '남 눈 의식하는' 교육으로 내리 찍히며 자랐을 것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가족 사진을 보니, 운동 선수로 잘 나가는 누나도 있다. 남매 사이에 비교까지 당하면서 살았다면, 상상하기 싫은 가족 구도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터트리는 게 어려웠을 것이고, 자라나면서 괜찮은 척 하는 게 익숙했을 법한 사람이다. 살면서 돈이 없는 게 더 나을까, 감정이 없는 게 더 나을까?


다음 회 예고편에 나오는 대사도 맘에 들어서 적어본다.


'왜 내가 사랑한 것 중에 '나'는 없을까?'


한 해를 마감하려고, 잘 보내주려고, 내일 하루 모처럼 휴가를 냈는데, 내일 종일 고민해 봐야 할 화두인 듯하다.새해에는 이런 기분을 술이 아닌 글로, 요가로, 건강한 대인관계로 풀고 싶다. 감정이 올라오면 울고, 위로가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주: 디폴트 (default) 기본 장착, 설정된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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