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따뜻한 그림 작가와 나눈 이야기
나를 매혹하는 많은 것 중 미술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미지가 가진 context는 신비로운 호기심을 품게 한다. 어떤 사물과 현상이 화가라는 필터로 재편 되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술가의 눈을 좋아한다. 그들이 그리고자 어떤 것을 바라보는 눈, 추상적인 눈, 색다른 곳으로 보내는 시선들, 그리고 그 눈으로 본 것이 그려진 그림 앞의 많은 눈. 그림에 집중하는 이해의 시간은 고요하고 깊다. 화가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처럼.
그래서일까. 나는 그림 그리는 이 친구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는 재작년 여름, 스타트업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동갑의 친구는 그림을 그린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친구와 나, 그리고 남은 몇몇이 사무실 한쪽에 놓인 미러볼을 꺼냈다. 불을 끄고 미러볼을 켜자 빛은 사방으로 튀었다. 우리는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슬픈 일은 있지만 그래도 춤을 추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없진 않아서 다행이라는, 그런 마음에 즐거웠었다. 이따금 이 친구와는 이렇게 순수하고 재미있는 상황들이 있었는데, 이상하지 않았고 일상적인 활력으로 특별한 것을 끌어오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가 일한 곳은 예상치 못한 재정난이 닥쳤다. 그리고 자연스레 직장을 잃고 말았다. 어려운 순간을 겪어서일까.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직장은 잃고 말았다.
난 친구와 함께 일하면서 언젠가 이 친구를 꼭 인터뷰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내 주변 친구들 중 뛰어나게 진취적이고 밝은 아이라서 난 스스로 친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나 보다. 친구의 도전하는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이 친구가 곧 하늘도 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했었다.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열망과 욕심이 큰 것과는 다르다. 이 친구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밝고, 늘 빛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친구가 작가로 활동하며 쓰는 예명은 ‘gogokoala’이다(이하 코작가라고 한다). 예명이 특이해서 이유를 물으니, 외모가 코알라를 닮아서라고 한다. 주변에서 알라 또는 코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거기에 gogo라는 진취적인 동사를 합쳐서 만든 예명이다. 난 친구를 주로 ‘코’라고 짤막하게 부른다. 코의 그림은 대체로 동그랗고 보드라운 색채를 지녔다. 그림은 자신을 그린 주인을 닮아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대화로 나눈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풀어본다.
“겨울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어?”
“노르웨이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 그래서일까. 요즘은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노르웨이 베르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방금까지 어떤 노래 듣고 있었어?”
“영화, 라라랜드 OST! 재즈에 해박한 건 아니지만 불규칙하고 자유로운 리듬감이 온 몸을 타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야.”
“코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거야?”
“응. 분명 잘 그리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자주 그리는 아이였지.”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고 있잖아? 근데 프리랜서는 수입이 일정치 않아서 불안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회사 생활 했을 때처럼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게 아니라 풍족한 달이 있는가 하면 빈곤한 달도 있어. 그래서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을 때면 이게 나한테 꼭 필요한 걸까? 하고 몇 번 질문하는 소비 습관이 생겼어.”
“일정치 않은 수입에서 오는 어려움은 어떻게 견딘 거야? 프리랜서로 자리 잡기까지 어려움을 견디게 한 원동력은 뭘까?”
“내 모든 시간을 온전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프리랜서로써 겪는 어려움을 견디게 해준 것 같아. 추운 겨울에는 이불 속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고, 평일 낮에 카페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우리는 보통 제도로 이루어진 삶을 꾸리도록 교육받으며 성장한다. 그래서 독립적인 힘을 기르는 데 필요한 끈질김이 부족하기도 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제도권을 이탈한 경제 생활로 돈을 벌고 제도권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돈을 쓰는 어려운 일이다. 자칫 외롭고 불안한 요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코 작가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견디는 지혜를 긍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얻었다고 했다. 밝은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받은 칭찬과 격려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코가 그리는 그림에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을까?”
“친구들에게 농담으로 내 뮤즈는 남자친구라고 말해. 남자친구 얼굴을 그만큼 많이 그리기 때문이야. 동글동글 개성 있는 외모라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해.”
“오래 길렀던 강아지 이야기를 자주 했었잖아? 또 들려줘.”
“중학생 때부터 16년간 같은 방을 쓴 강아지, 꼭지는 내 여동생 같은 아이야. 비록 작년 여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지만 매순간 그리워하고 있어. 이 그림은 꼭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얼마 안 지나, 그리움을 표현한 그림이야. 언젠가는 꼭지 이야기를 그림으로 꼭 만들고 싶어서 준비하고 있어"
언젠가 코 작가는 나에게 철새의 이동하는 모습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다. 무리를 이끄는 선두의 새가 있고, 뒤처지는 동료와 속도를 맞추어 함께 날아주는 끄트머리의 새가 있다는 것. 그리고 친구는 길고양이에게 밥과 간식을 사주며 정을 나누기도 한다. 주변을 사랑으로 살피는 코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 마음은 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코 작가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영어 워크북, 기업 사보, 단행본(‘나는 세상으로 출근한다’, ‘남심탐구 여심탐구’), 제품과 광고 일러스트, 청첩장 일러스트 등을 해왔다. 무엇보다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서 꾸준히 개인 작업에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난 늘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해.
내가 갖고 있는 긍정 에너지를 그림에 담고 싶어.”
“코, ‘그림 그리길 정말 잘했다’하는 순간은 언제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수 있구나, 하고 자각한 순간이야. 물론 풍족하게 벌지 못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림이 가진 힘은 뭘까?”
“글과 다르게 어려움 없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팁이 있을까?”
“노홍철이 라디오 클로징 멘트로 늘 하는 그 말을 건네고 싶어.”
여러분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우리는 삶에 어떤 특별한 일이 생기길 원한다. 인생에 찾아오는 사건을 계기로 삶이 변화되길 원한다. 하지만 삶이 커다란 사건으로 변화하는 일은 사실 드라마틱하지 않다. 진짜 드라마는 삶에 찾아오는 매순간을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쓰인다. 사건의 중대성 여부가 아니라, 어떤 주어진 순간이든 맞이하는 개개인의 대처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코 작가는 이런 긍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친구다.
“요즘 갖고 있는 고민은 뭐야?”
“늘 이루고 싶은 것 중에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포함되어 있어. 최근에 만든 이야기로 더미북을 만들고 있는데 매번 어려움의 연속이라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어.”
“앞으로 어떤 계획들을 갖고 있어?”
“한 해의 목표를 종이에 적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고 늘 보고 있어. 적힌 내용은 그림책 작가로 데뷔하는 것,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술술 하게 되는 것, 자유형 100m 완주, 스쿠버 다이빙, 일주일에 한 권씩 책 읽기, 다이어트 등이야.”
야무진 계획을 세워둔 코 작가는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묻자 머뭇거림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수영을 1년 동안 꾸준히 배우고 있는데 라이프 가드 자격증을 따거나 철인 3종 경기를 나가보고 싶어.”
“좋아하는 작가를 소개해줘.”
“화가는 데이비드 호크니, 에드바르크 뭉크, 앙리 마티스야. 그림책 작가로는 고미타로와 존 클라센을 좋아하고, 영화 감독은 웨스앤더슨과 스탠리 큐브릭, 다미엔 차젤레, 라스폰트리에, 다르덴 형제야.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영향 받고 싶은 작가들이지.”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등바등 힘겨운 살이지만 결국 또 살아지는 내일이 온다면 열매를 수확할 밭을 일궈야 하지 않을까? 복잡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그나마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또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이라면 꾸준히 해볼 가치가 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 될 일들에 비일비재하다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노력하는 일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 코 작가는 이런 자신감으로, 삶의 태도가 늘 당당하고 멋지다.
코 작가는 인상 깊었던 책으로 데미안을 꼽았다.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걸 내포한 데미안.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모두가 나름의 노력을 다해 목표로 향하는 존재임을 설명한다. 이 인터뷰를 읽는 모두도 목표를 향해 수고하며 나아가는 중일 테니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여기, 코 작가가 꼽은 데미안의 한 구절로 끝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일 뿐만 아니라, 단 한 사람일 뿐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목할 만한 존재 그 자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