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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Jul 16. 2018

[채식주의자 - 한강]

1. 채식주의자


영혜의 갑작스러운 채식은 잠잠하던 부부 관계의 일상을 깨뜨리고 가족을 뒤흔든다. 그들은 영혜가 채식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든 육식을 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뺨을 때리고 몸을 붙들고 억지로 입을 벌려서라도 고기를 집어넣으려는 가족들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지독한 장면이다. 흡사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채식이 뭐라고...... 그렇다고 비쩍 말라가는 딸의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도 가족이 보일 반응은 아니다.

주변의 반응은 여러 시위에서 혹은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혼란만 일으킨다며 성가신 존재로 보는 시선을 떠오르게 했다. 평화적인 방법에 언제나 평화적인 반응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영혜가 손목을 긋는 것으로 마무리되듯, 현실에서도 상황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또 한 가지, 가족이 주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부장적인 가족의 폭력성이 많이 드러났다. 그런 이야기의 흐름이 억지스럽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읽는 동안 많이 불편했다. 가정은 구성원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곳이라고 알아왔지만, 실은 가족이 나에게 요구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우리 모두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희생으로 시작되어 희생으로 유지되는 가정에서 우리 모두 거기에 빚을 지고 있으므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채무에서 묘한 강제성이 느껴졌다. 밤에 병실에서 영혜를 속여가면서 염소 즙을 먹이는 엄마의 모성애는 소름 끼쳤다.


2. 몽고반점


강렬한 영감을 어떻게든 구현하고 싶은 예술가의 욕구와 그걸 가로막는 윤리적 벽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이처럼 긴장감을 갖고 따라간 적은 없었다. 영혜는 채식을 하겠다는 집념이 있었다면,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에게는 자신을 그동안 애달게 했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채식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는 처제의 저항의지와 절실함, 그리고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상징하면서 엉덩이에 찍혀있어 더 은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녀의 몽고반점이다. 처제는 그가 그리는 예술작품을 완성시킬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신기하게도 그와 그녀는 묘하게 통하는 교집합(꽃과 관련된 이미지)이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작업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수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만큼 그 경계를 넘자마자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달린다.

욕망을 실현시킨 결과는 가정의 파탄이다. 만약 그의 아내가 그 테이프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미 선을 넘은 그가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뭐가 되었든 그의 가족은 파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앞의 ‘채식주의자’와 연관시켜보면, ‘몽고반점’ 역시 주인공의 욕구가 가정을 뒤흔들고 끝내 파괴시킨다. 그들 앞에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고통스러워하느냐 아니면 끝가지 고수하면서 필연적인 파멸의 과정을 밟아가느냐, 두 개의 길 밖에 없었다. 두 인물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게다가 영혜 혼자일 때 보다, 영혜를 이해한 형부와 같이 일을 벌였을 때 가족에게 닥친 후폭풍이 어마어마했다.

둘의 정사는 자칫 거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를 단순 불륜 사건으로 봐야 할까. 그들의 섹스는 서로를 향한 불편한 애정에서 나온 게 아니라 서로의 이상을 향한 몸짓이었다. 영혜에게는 자신이 꽃이 되어 또 다른 꽃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미지에, 형부에게는 자신이 꿈꾸던 형상을 드디어 완벽하게 자신이 직접 구현해 낼 수 있게 됐다는 환희에 젖어있었다. 운명의 장난이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을 형부와 처제로 만들었을 뿐이다.


3. 나무불꽃


동생의 갑작스러운 채식에 의해 흔들린 가족은 남편의 예술적 욕구로 완전히 파괴된다. 그리고 그 짐을 인혜가 그대로 떠안는다. 부모도 남동생 부부에게도 외면당한 그녀 곁에는 이 모든 것의 발단인 영혜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지우 밖에 없다. 영혜는 채식이 좌절되고, 아예 나무가 되려고 해 식읍을 전폐한다. 꾸준히 영혜의 면회를 가는 그녀의 모습에, 김훈의 ‘공터에서’의 마차세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의 삶이 아버지부터 시작된 가족이라는 고리에 묶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념한 듯 끌고 가듯이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삶을 끌어간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만, 다소 일관적인 태도인 마차세와 달리, 인혜는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꿈이고 행복인 것처럼 누구보다 성실히 노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다가 그녀는 남편과 동생의 사건 이후, 남은 잔해를 돌아보면서 마치 관성처럼 유지해온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된다. 살아가는 것보다 견디는 것에 가까웠던 그녀의 삶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살아온 삶을.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라고 반문하는 동생의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는다. 자신의 삶은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삶이 끝나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고, 실제로 끊으려고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기 위해 뒷산에 가지만, 다시 내려온다. 그 이유에는 지우와 영혜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야생에 제멋대로 자라난 수많은 나무들에게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꼿꼿이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인혜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명력을 느끼고 압도되었을지도 모른다.

결말에서 인혜는 다시 버티는 삶으로 돌아온 것 같다. 늘 그래 왔듯 영혜와 지우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모든 게 꿈일지 모른다며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저 지나갈 일로 여기면서. 결국 인혜는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후반부에 인혜는 영혜의 감정을 조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영혜가 보는 이미지를 자신도 그려보고 꿈에서도 본다. 남편의 비디오도 음란물이 아닌 어떤 낯선 것을 말하려는 몸부림으로 바라보며 조금씩 받아들인다. 이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채식에 보였던 가족들의 폭력적인 반응과 반대된다. 그 입장에 서보고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고 완전한 치유는 못해도, 흉터로 품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가족이라는 단어의 먹먹함을 느꼈다. 가족이 안고 있는 짐과 상처는 얼마나 많을까. 상투적인 말이지만 사랑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세 개의 단편을 엮은 하나의 이야기다. ‘채식주의자’에서는 가정이 요구하는 정체성에 반대하며 주체성을 가지려는 노력과 그 투쟁을 통해 드러나는 가정의 폭력성을, ‘몽고반점’에서는 가족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개인과 필연적으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욕망 그리고 결국 그것을 끝까지 추구했을 때 맞이한 가정의 파멸을, ‘나무불꽃’은 상처를 입고 그 잔해 속에서 그대로 같이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직시하며 극복하고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미 모든 것들이 짜인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를 뒤흔들고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받은 상처와 흉터를 품고 가는 것도 가족과 사회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역시 이해와 공감 이리라.


영혜와 형부가 자신의 욕구를 좇을수록 무너지는 가정을 보면서, 마치 행복의 에너지 보존 법칙 같은 게 떠올랐다. 행복의 파이는 결국 더 커질 수는 없는 건가. 구성원의 행복에는 또 누군가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건가. 어쩌면 가부장적인 가정이 가지는 보수적이고 정적인 면이 그 파이가 커지는 것을 막고, 그걸 유지하는 데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말로 했을 때는 얼마나 뻔하고 들으나 마나 한 얘기인가. 하지만 이렇게 인물들의 삶과 마음을 따라갈 때 오는 감정은 다르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배울 때 더 많을 걸 느끼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다른 어떤 지식을 얻었을 때보다, 사람을 이해했을 때 오는 감동이 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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