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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웨이 Feb 27. 2024

오랜 세월에  금 가거나 멍들지 않는 찻잔이 있으랴

- 제주 스테이  '잔월'의 찻잔-




작은 언니가  떠 도는 톡글 한 편을 자매  단체 톡에 올렸었다.


제목은 11층 여자

11층에 사는 여자가 괴로운 세상을 하직하기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리면서 그녀는 보았습니다.

10층 창문에는 평소에 금슬이 좋고 화목해 보였던 부부가 싸우는 게 보였고,

9층에서는 항상 맑고 밝고 유쾌하고 잘 웃던 남자가 혼자서 우는 게 보였고,

8층에서는 남자들과 말도 하지 않고 도도하게 굴던 여자가 옆집 남자와 바람피우는 게 보였고,

7층에서는 건강하다고 자랑하던 여자가 몇 가지 보약 먹는 게 보였고,

6층에서는 돈 많다고 늘 자랑하던 남자가 일자리 찾는 신문을 뒤적이는 것이 보였고,

5층에서는 듬직하고 깔끔했던 남자가  여자 속옷 입고 히쭉거리는 변태를 보았고,

4층에서는 원앙 커플로 엄청 사랑했던 연인이 서로 헤어지려고 싸우며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싸우는 게 보고,

3층에서는 노인 정에서 할머니들과의 관계가 복잡하던 할아버지가 혼자 한숨 쉬는

   쓸쓸한 모습을 보았고,

2층에서는 이혼하고 남편을 욕했던 여자가 그래도 전 남편이 최고라고 넋두리 하며 남편을

   그리워하는 걸 보았고...

11층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같은 사람들 천국으로 인도한다던 목사 부부가 심하게 다투고 있는 것을 보니

어차피 인생살이가 다 엇 비슷하고 사람마다 말 못 할 사정과 어려움은 다 있었다.

요모조모 따지고 보면 나도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었다.

떨어지면서 내가 보았던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

그들도 나를 보며 자기는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했을 거다...

후회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악" 소리 질렀더니

'엄마! 왜 그래?' 하는 딸의 소리에 그만 낮잠에서 깨었더랍니다.


글도. 몸도. 마음도. 찻집 정리도. 한계에 온 듯싶게 피곤한 나날. 연재하는 글 마저

발행하지 않았습니다. 써놓긴 했으나 무엇인가 빠진듯한 글은 차마...

 마침 일 년 전부터 준비해 예약해 놓은 여행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2박 3일 제주 여행에 왔습니다. 멤버는 초임지에서 만났던 40년 지기 샘들 다섯.   파릇파릇한 새싹 초짜 교사들이 이제는  국가 인정 정식 초보 노인들이 되어 뚜벅뚜벅 노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참입니다. 마음은 젊은데 그 젊은 맘은 볼 수도  만질 수 없는 헛것일 뿐입니다. 불쌍하다고 봐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생, 노, 병, 사 자기 길을 걷는 몸의 길에 휘둘리며 노년의 길을 갑니다.   

 여섯 명 중 한 분은 이미 몸에 휘둘려 여행을 같이 못 다닌 지가 꽤 되었습니다. 나는  몸의 부실한 곳을 찾아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 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눈썹은 눈썹 문신으로 힘을 주고   부족한 뼛속 골을 채우기 위해 골다공증 주사도 맞습니다.    비틀어지는 몸의 균형을 위해 요가도 합니다.  

노력한 만큼 조금씩 리모델링도 되는 것 같지만... 정말 안타깝게 리모델링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입니다.


젊은 시절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 스트레스로 맘이 상해도  잠

 한번 푹 자주면  어느 우주의 동굴에서 쉬었다 오는지.. 뇌 속이 개운해지고 텅 비워져 완전 리셋이 되어

 다시 출발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열리고 새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던  그 잠!!!!! 그 잠은  이제 이생에서는 영영 만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보다 영빨이 민감하고  발달해서  잠 이 주는 귀한 선물인  꿈을 엄청 받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태몽을 풀이하며 소통하던 즐거움.

 , 똥, 물, 새, 부고, 산... 꿈속의 상징물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알고  가끔 복권도 사고 아직도 내게 남은 귀인도 혹시 있을까 가슴 조이던 꿈. 이제 그 꿈의 물줄기는 끝났고 그 자리에 잠꼬대와 코 고는 소리만이 요란합니다. 잠꼬대 코 고는 소리.. 느려진 몸.

 타인에게 민폐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내 알량한 자존심은  이 모임도 내가 정리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호시탐탐 빠질 궁리 중이었습니다

 예약만 해주고 핑계 대고 빠지자...

 

식도락도 , 경치도 , 쇼핑도, 사람 구경도. 핫한 풍경 그런 여행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다

스.. 테.. 이  

이 말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고기 굽는 펜션도 아니고  , 쇼핑  강변뷰 바다뷰 시티뷰 하는  럭셔리 호텔도 아닌 , 일상여행인 비엔비도 아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잘 자고 싶고 꿈꾸는 공간" 아닐까? 더구나 찻잔까지 낀.....

요란한 코골이,  옆사람 잠 못 자게 하는 잠꼬대.. 약기운이 없으면 , 느릿해지며 무슨 지랄을 떨지 모르는 몸. 아.. 그런데 스테이잖아. 잠시 자존감은 찜 쪄먹자. 심란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여행에 참석한 참입니다.




허름한 마을 골목길 공간, 대문을 여니 오늘 종일 본 그 많고 흔한 동백꽃도 아니고 방금 일인 천 원씩 내고 사진 찍은 산방산 밑 노란 유채꽃도 아닌 저승에 들어선 것 같은 쓸쓸하고 삭막한 갈대...

그러나 실내로 들어서자 이런 풍경이...

 ... 따뜻한 공기, 차분하고 정성스러운.  공간 하나하나 창을 낸 곳을 보시라. 문득 짐처럼 부담되는

내 몸도 이 공간에서는  귀히 여겨집니다.

 




잠시 일행들이 간단한 저녁을 먹으러 마을로 산보 나간 사이 혼자 고요하게 차를 마셨다. 이 오롯한 찻자리를

위해 밥도 거절했다. 다탁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 높지도 낮지도 않게 편안한 데다가 마당의 조경과 나무 사이의 지붕 풍경이 양명함보다는 약간의 그늘과 촉촉하고 무속적인 원초의 감성... 맞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생사를 헤맨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도 포기하고 차디찬 윗목에 뉘어 놓았을 때 끝까지  찬물 떠놓고 빌었다던 외할머니의 비나리.. 아픈 손으로 거친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세상에서 제일 귀히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

 



철저히 식물성인 찻잎에서 어떻게 그리 느끼하면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향이 나는지.. 늘  궁금한 우롱차  였는데  우롱차 증에서도 내 마음의 모서리 각진 날카로움을 다 제거한 듯한 부드러운  '밀키 우롱티 ,포근' 포근 차  한 잔 에  마음의 허리띠도  다 풀러져 느슨해져     버렸  


 뿐인가 ..이성적으로 생각을 몰아가 메말라 있던 내안의 잠자고 있는 감정이 꽃잎과 찻잎향에 질컥하게  빠지게 한다.  ' 브라보 마이 라이프 '- 오렌지와 껍질 그리고 루이보스로 이루어진 진중이라는 차- 라는 이름의 차가 오늘 이 공간의 웰컴티였다.

 

이 두 개의 차면 충분하다. 이 차실에서 일행들과 마시고 싶어 준비해 많은 티들은 다시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다.





술만 취하는 게  아니라  차 한잔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차에 취한 내 혀와 마음은 아온 일행들에게 밀키우롱티 잔씩 대접하면서 미쳐갔다. 내가 입었던 옷을  울다가 웃다가 욕하다가 토하다가 하나씩 벗고 알몸이 되었다.  더 이상 벗을 옷이 없는  알몸이 되었을 때 잠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후회를 했다. 그러나 내 찻잔은 금이 가고 줄줄 새어서 없으니 이제 모임도 굿바이 하고 고백만 하면 된다 했던 순간..


안정되고 귀한 찻잔으로 자리 잡고 자신감 넘쳐 보이던 찻잔이 젊은 시절 일찍도 깨진 찻잔으로 숨죽이며

 불안하며 보내왔던 아픔을 눈물 한 방울로 떨구어내자  남은 찻잔의  깨진 찻잔 릴레이 수다가 시작되었다.


언니가 보낸 톡글의 11층  여자는

자기의 힘듦이 자기 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도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불행에서 벗어났다.


나 역시 내 찻잔만 깨지고 금 간 줄 알았는데 다섯 개의 찻잔 모두  금이 가고 깨지고... 열심히 산 사람일수록 더 깊게 깨진 상처가 나 있다는 것. 깨진 찻잔이었음에도 이 모임에서는 깨진 찻잔이 아닌 있는 그래로 대접받았음을.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걸 나만 내 오만으로 눈 감고 있었음을..


 이미 알몸으로 서로의 상처를 애틋하게 짠하게 여기며 좁은 욕조에서 기대고  있는 분들 사이에 내 부끄러운 알몸을 비집고 넣었다.

내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야


오늘은 이 공간 저 침대에서 잃어버린 잠을 찾아 잘 자고 싶다

늙은 몸의 잠은  젊은  몸의 잠과는 달라야  한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긴 잠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이 죽음이다.

품위있게 죽고 싶다. 품위있게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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