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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I SEE YOU 04화

#3 시그널 - 일 폭탄을 맞는 이유

by 해요

2025년 10월 28일



한달음에 뛰쳐 들어간 여자 화장실.

얼른 바지를 내리고 좌변기 시트 위에 앉아 한숨처럼 툭 내뱉은 한마디.



어후 힘들어...


오늘도 주희는 전장을 누비는 장수처럼 업무를 본 탓인지 빵빵하게 차오른 방광의 신호도 여러 차례 무시하고 점막이 바짝 말라 까끌거리는 목구멍에 물 한 방울 넣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인지했다.


이 직장에 몸담은 지도 햇수로 6년 차.

어느 부서에서건 2, 3년만 경력을 쌓아도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는 일 없이 수완도 늘고 요령이 생겨 몸은 한결 편해진다던데 만년 신입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주희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내가 신입 때는 어땠더라...?


주희는 일을 빨리 배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면 직속 상사들한테 싹싹함으로 점수를 땄어야 했는데 그쪽으로는 영 젬병이었다. 신입 때 일도 더디 배워, 그렇다고 친화력도 없어~ 그러니 어디서나 팩트폭격으로 공개처형 당하기 일쑤였다.





신랄한 독설가 선배들한테서 배운 게 있다면,


결코 경력을 앞세워 후배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실수 앞에서 인신공격 등의 막말을 하는 일만큼은 결단코 만들지 않겠다는 확고한 마음가짐.


주희는 습득하고 숙련되기까지 남들보다 평균 속도는 늦었지만 항상 꾸준했고 요령을 피우지 않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담당 업무에서만큼은 가히 실력자라는 평가를 들어왔다. 하지만 내내 고민으로 떠오르는 건, 후배들의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하는지 낄끼빠빠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가 회사 화장실에서 날 새겠네!


자리로 돌아가 텅텅 비어있는 사무실 소등까지 확실히 한 후 회사를 나섰다.

현관문 앞에 오기까지 몇 번이나 무릎이 꺾이던지 오늘 쓸 에너지를 방전한 모양이었다. 지친 몸으로 당장 침대에 다이빙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미온수가 세차게 쏟아져내리는 샤워기 물줄기를 얼굴로 맞았다. 그리고는 하다만 생각을 이어 붙였다.


일을 떠넘기거나 험담을 하는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남들이 기피하는 일이라 해도 내가 잘하는 일을 독점한 탓에 후배들이 성장할 경험이 사라진다면 나는 과연 괜찮은 선배가 맞을까? 결국 이기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매한가지 아닐까...


오늘도 이대로 답은 안 나올 모양이다.

어느덧 새벽 2시.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한 다리를 접어 이불속으로 엉금엉금 진입 완료. 오늘도 혹시나 꿈이 해답을 보여주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미끄러지듯이 잠에 빠져든 주희.


꿈을 꾸고 안 꾸고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이날은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잠든 주희의 머릿속으로 파노라마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때는 19세기 후반. 오래된 서류와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 차있는 영국의 크리스토퍼 포드 박사의 연구실이다.


크리스토퍼 포드 박사 (Dr. Christopher Ford, 50대 중반)는 다소 신경질적이고,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천재 과학자이다.

에드워드 그레이엄 (Edward Graham, 30대 초반)은 포드 박사의 젊은 조수였으나 현재는 유명 학술지 편집장으로 깔끔하고 냉철한 인물이다.


#1

박사의 연구실(낮)


(포드 박사가 떨리는 손으로 최신 학술지를 들고 있다. 표지에는 '에드워드 그레이엄 박사의 혁신적인 발견: 전자기파의 재구성'이라는 제목이 크게 쓰여 있다. 연구실은 어둡고, 먼지가 희미한 햇살 속에서 춤춘다. 포드 박사의 시선은 복잡한 수식과 미완성된 기계들이 놓인 자신의 책상을 향한다.)


포드 박사 (쉰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내… 내 거야. 저건 내 수식이고, 내 모델이야.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그가 책상 위에 놓인, 그레이엄의 논문 표지와 놀랍도록 유사한 수식이 적힌 낡은 노트를 쾅 내리친다.)


포드 박사 (격렬하게) 그자는 내 영혼을 통째로 훔쳐 간 거야! 수십 년의 땀과 밤샘, 이 모든 고독이 겨우 저런 제목 한 줄로… 남의 이름 아래 묻히다니 내가...!

(그가 학술지를 구겨 던지려다 멈춘다. 대신, 구겨진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손가락으로 그레이엄의 이름을 강하게 문지른다. 그의 눈빛은 격앙과 비통함, 그리고 맹렬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포드 박사 (광기 어린 목소리로)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진짜 완성은… 여기에 있어. 그자가 훔쳐 간 건 껍데기에 불과해. 핵심은… 핵심은 내가 쥐고 있지.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연구실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 장치(자신의 미완성 발명품)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기계를 쓰다듬듯 만진다.)


포드 박사 (기계에 대고 속삭이듯)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유산이여. 사람들은 너를 조롱했지만,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그레이엄 따위가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증명을 해낼 것이다. 오직 너만이, 너만이 나의 이름을 불멸로 만들 것이다.



#2

박사의 연구실 (며칠 후, 밤)


(며칠 밤낮을 기계 작업에 몰두한 듯, 포드 박사의 얼굴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그는 기계의 마지막 나사를 조이고, 땀을 닦는다. 이때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레이엄이 들어온다.)


그레이엄 (안타까움과 우월감이 섞인 목소리로) 박사님, 여전히 이러고 계십니까. 냄새가… 연구실이 엉망입니다. 이제 그만 쉬셔야죠. 세상은 이미 저의 논문을 인정했습니다.

포드 박사 (기계를 보호하듯 몸을 돌려 막아서며) 인정? 네가 훔친 것을 인정했겠지. 나는 너를 믿었다, 에드워드. 너는 나의 학문적 아들이었어!

그레이엄 (냉정하게) 저는 박사님의 '아들'이 아니라 조수였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의 그 '성과물'은 10년째 제자리였습니다. 박사님은 결론을 두려워했죠. 저는 단지 박사님이 놓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입니다.


포드 박사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지막 한 걸음? 그건 내 노트를 밤새 베껴 쓴 것일 뿐! 이 기계, 이 실험이 없이는 네 논문은 가설에 불과해!

(포드 박사는 기계를 가리킨다. 기계는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유리관이 빛나고 있다.)

포드 박사 (자부심과 집착이 뒤섞여) 이것이 증명이다! 네가 훔쳐 간 종잇조각을 현실로 만드는 나의 유산! 나는 이 기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 이것만이 나를 세상의 심판대 위에 다시 세울 것이다!


그레이엄 (경멸하듯 웃는다) 박사님. 이미 늦었습니다. 학계는 속도가 생명입니다. 세상은 이제 저를 이 분야의 권위자로 부릅니다. 박사님은 영원히… 미완성의 천재, 이론을 놓친 괴짜로 기억될 겁니다.

(그레이엄은 포드 박사의 낡은 연구복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포드 박사는 이 모멸적인 시선에 격분한다.)


포드 박사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나가! 당장 내 연구실에서 나가! 네가 훔쳐 간 모든 것을 돌려받을 때까지, 나는 이 기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가 이룬 모든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레이엄은 태연하게 모자를 고쳐 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간다. 문이 닫히자, 포드 박사는 기계 쪽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전원을 올린다. 기계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하고, 포드 박사의 얼굴에 광적인 희열과 애착이 떠오른다.)

포드 박사 (기계를 안고 헐떡이며) 이것은 오직 나를 위한, 나의 진실이다! 아무도 뺏을 수 없어.





주희는 잠에서 깨자마자 서늘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이내, 눈 앞에서 조수한테 일생의 역작을 빼앗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포드 박사의 그늘이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아무리 힘든 일도 기어코 혼자 힘으로 직접, 손수 해내려고 했던 고집스러움이 무슨 연유에서 나온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해서 본의 아니게 과로하고 솔선수범 했던 삶.


이제는 조금 홀가분해질 차례다. 주희는 결심한 바가 있어 그런지 오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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