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구상나무 자생지에서
한라산 중턱에서 구상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멀리서 보면 여전히 숲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죽음의 그림자가 보인다.
회색빛 잔가지만 남은 줄기,
비틀린 뿌리,
아직 쓰러지지 않은 나무의 마지막 버팀.
누군가는 말했다.
“기후 변화 탓이지 뭐.”
그 말은 사실이지만, 너무 쉽게 끝난다.
마치 ‘변화’라는 말이
모든 상실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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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는 남쪽에서 자라는 유일한 구상나무속 식물이다.
겨울에도 푸르고, 바람에도 굳세다.
가지에 가시 없어 부드러워 아이가 만져도 다치지 않아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랑 받았고
이제는 멸종위기종의 상징이 되었다.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할수록,
그 나무의 고향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집 안의 트리 조명은 반짝이는데,
한라산 숲은 불빛 없이 스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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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그냥 나무의 집이 아니다.
한 그루가 쓰러지면, 그 아래 살던 이끼가 죽고,
이끼를 먹던 곤충이 사라지고,
그 곤충을 먹던 새가 떠난다.
빙하기 이래로 한라산 중턱 생태계의
한 축이었던 구상나무가 사라지면
그 생태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결국,
그 숲을 오르던 우리의 발길이 멈춘다.
우리는 나무를 잃는 게 아니라,
숲의 언어를 잃고 있다.
소리, 냄새, 기운.
그 모든 생명의 문장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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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라산 정상 근처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예전엔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미끄러졌는데,
이제는 그 바람이 부딪힐 잎이 없다.
대신 메마른 가지가 바람을 흩트린다.
그 소리는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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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자생지’란 결국,
그 생명이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 아닐까.
그 자리를 잃는다는 건,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구상나무는 더 이상 ‘한라산의 나무’가 아니다.
온실 속 실험용, 공원의 장식용으로 흩어지고 있다.
자생지를 잃은 생명은,
살아 있어도 고향이 없는 존재다.
자생지를 잃은 종은
그 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실험하고 찾을 수 있는 현장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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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사라지는 것은
구상나무가 아니라, 시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한라산의 바람과 구름, 비와 눈,
그 모든 요소가 함께 만들어온
‘천 년의 생태적 문장’이
한 구절씩 지워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장을 다시 쓸 수 없다.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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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언어보다 오래된 언어다.
우리가 그 말을 잃는다면,
인간의 말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프롬프트 김나솔
글 ChatGPT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