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내향인 소심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

남편에게 말 못 한 그 이유

by 달려라희야

하... 헤어져.. 뚝.


MBTI 검사를 하면 내향형 80%로 나오는 I인 내가, 파워 E인 인싸들만의 취미인 것 같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실연'이었다.

남편에게 말 못 한, 아니 굳이 말 안 한 이유였다.

사실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애정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었던 열망이 최고조였던 서른두 살의 헤어짐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공허함과 씁쓸함을 넘어서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또 언제 남자를 만나고 사귈까.. 이러다 결혼 못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부정적인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맴돌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급할수록 돌아가자.


당분간 연애는 접고 나에게 집중할 때였다.

먼저 평소처럼 독서, 먹방 등 정적인 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으나 크게 효과적이진 않았다.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침잠하는 에너지를 끌어올릴 운동과 같은 동적인 활동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운동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바로 주변에서 흔히 하는 운동들을 찾아보았다.


테니스: 테니스 코트 구하는 게 너무 번거로워. 테니스채도 무겁잖아. 패스!

배드민턴: 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 없나?

발레: 나랑 안 어울려. 살 빼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

크로스핏: 너무 힘들 것 같아. 시작할 엄두가 안나.

달리기...

아빠도 한때 마라토너였으니 나도 그 피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별다른 도구도 필요 없고.

그래, 달려보자.


카페에서 독서하는 나에서 공원에서 달리는 나로

초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열혈 마라토너였던 아빠는 새벽에 나를 깨워서 호수공원 마라톤 클럽에 데리고 가셨다.

얼떨결에 따라가 처음 마주한 새벽 달리기는 너무 힘들었고, 꾸역꾸역 호수공원 한 바퀴를 겨우 뛰고 난 뒤 아빠에게 짜증을 버럭내고는 두 번 다시 뛰지 않았다.

그런 기억에서 인지 종목은 정했지만 바로 뛰어지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뛰어야만 하는 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지만 더 이상 생각은 멈추고 시도해봐야 할 때였다.


독서모임할 때 쓰던 소모임앱을 켜서 주변에 달리기 모임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의외로 정말 많았다.

'내가 너무 내 세계에만 갇혀있었나 보다 정말 많네. 일단 가보자.'

결정하기까지 생각이 많지만 오랜 생각 끝에 결정하면 바로 실행하는 성격인 나는, 집 근처 달리기 모임에 가입한 뒤 주말 달리기 일정에 바로 참석버튼을 눌렀다.


달리기 모임날,

옷이랑 신발만 대충 갖춰 입고 나가서는 뻘쭘함에 어쩔 줄 모르고 쭈뼛쭈뼛 대고 있었다.


"처음 오신 분이죠? 페이스 얼마나 뛰세요? 630?"

('630이 뭐지?') "아.. 저 달리기를 취미로 가져보고 싶어서 왔는데 처음 뛰는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럼... 제가 페이스메이커 해드릴게요. 저랑 같이 뛰어요."


알고 보니 630은 1km당 6분 30초로 뛰느냐를 묻는 것으로 페이스를 물을 때 러너들이 흔히 쓰는 은어였다.

처음이라 은어도 모르고 쭈뼛대던 내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착장한 러닝아이템들과 다부진 몸으로 러닝고수임을 알 수 있던 그분이 선뜻 손을 내밀어주셨다.

기본적인 달리기자세부터 어깨힘 빼는 법 등 정말 초보자에게 필요한 핵심을 콕 짚어 알려주셨다.


"허리 펴고, 양손에 힘주지 말고 날달걀 한 개씩 쥐고 있다고 생각해요. 헛둘헛둘."

"네...! 숩하숩하."

"생각보다 잘 뛰시는데? 처음 뛰는데 여자분이 이 정도면 잘 뛰는 거예요. 지금 별로 힘들어하지도 않네. 처음에는 뛰고 너무 힘들어서 다 죽으려고 하거든요."

"아 그래요? 그래도 옆에서 도와주셔서 잘 뛴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첫 달리기 모임에서 쉬지 않고 무사히 5km 완주를 했다.

완주했다는 뿌듯함, 달리기로 인한 심장의 쿵쾅거림, 오랜만에 흘려보는 땀, 잘 뛴다는 칭찬이 점점 나를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이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달리기 모임에서 뵌 분들은 남성분들을 비롯해 여성분들 또한 늘씬 탄탄한 몸매 그 자체였다.


'내 몸은 출렁출렁한데 저분은 나보다 10살 이상 많은데도 군살하나 없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

그리고 달리면 다이어트도 엄청 될 거고, 오래 달리는 분들 대부분 몸이 늘씬 탄탄한데 나도 그런 몸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래, 이번 기회에 달리기로 다이어트도 하고 기분전환도 해보자.'


그렇게 실연과 아빠, 그리고 다이어트라는 이유들이 버무려져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미래가 두려웠던 나에게

보물 같은 남편과 아들,

미래를 기대하게 된 지금의 나를 선물해 준

작지만 커다란 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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