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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08. 2024

한 인간의 끝없는 정체성과의 다툼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을 읽고


 '읽고 쓰고 표현하기'의 감각을 글로 남기는 공간입니다.

※ 스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분신》은 첫 장편 《가난한 사람들》에 이어 1846년에 도스토옙스키가 두 번째로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기대와는 달리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그 진가를 인정받아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시간이 지나서 이미 작가가 어둡고 깊은 무덤 속에 영원히 안치된 마당에 긍정적인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은 굉장히 흥미진진하지만 대단히 곤혹스럽기도 하다. 왜, 그럴까? 바로 분신이라는 주제 때문이다. 그 분신이 나를 불편스럽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줄거리부터 풀어보며 생각해 보자.


《분신》은 9등 말단 문관인 골랴드낀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인물인 분신을 만나 갈등하며 인간적으로 파멸해나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골랴드낀은 관청에서 일하다 어느 날 분신을 만난다. 그 분신은 원본보다 더 똑똑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욕망에 가득 찬 인물로서 점차 원본인 골랴드낀의 삶을 침범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는 골랴드낀이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지다 미쳐서 정신병원에 실려간다는 이야기.


분신은 어느 날 느닷없이 진짜 골랴드낀에게 찾아온다.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를 배회하던 골랴드낀 앞에 분신이 극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쌍둥이가 아니다. 완전히 골랴드낀을 똑닮은 또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골랴드낀인 것이다. 기묘한 것은 분신의 등장이 골랴드낀에게만 충격이라는 사실이다. 직장에 나타나 골랴드낀의 업무를 빼앗아가는 분신의 모습을 보고도 동료들은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주인공의 형편없는 존재감이란…


골랴드낀은 괴팍하고 화를 쉽게 주체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에다 주변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다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골랴드낀은 사람들에게 좀체 다가서지 못한다. 직장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거의 고립된 셈인데,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훨씬 사교적이며 사람들의 기호 파악에 능하고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 분신의 등장이라니!


소설을 읽으며 '분신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왜 골랴드낀 앞에 분신을 등장시킨 걸까?'라고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분신은 골랴드낀의 내면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할까? 실제로 그 자체로서 완벽한 한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일까? 나는 전자로 보았다. 분신은 골랴드낀의 자아를 물질세계에 투영한 것이다. 골랴드낀의 욕망을 대변하는 자아로서 골랴드낀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임이 분명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우리 마음 안에 여러 존재가 각각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체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분신》의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닐까. 골랴드낀의 억압된 욕망과 열등감과 수치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픈 갈망이 분신을 태어나게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내면의 분리를 현실과 환상을 경계를 넘나드는 교묘한 기법으로 이야기를 창조했다. 독자는 초현실인지, 골랴드낀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망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 혼란이 이 소설의 깊이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인간의 실존을 놓고 처절하게 벌어지는 사투를 엿보는 관점으로 이 소설을 대한다면 재미는 달라진다. 한 명의 개인에게 내재된 선과 악, 이상과 현실에서 대립하는 갈등을 분신이라는 이미지로 대체한다면, 이 소설의 의미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 인간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체성의 싸움이라는 측면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 골랴드낀은 파괴되었지만 파괴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신이 남아 있으니까!



2.

어디 소설뿐일까. 나 역시 마음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분신 간의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어느 분신은 지나치게 소심하고, 또 다른 분신은 할 말이 많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해 이렇게 글이라는 수단으로 비겁하게 의사를 표시하는 분신, 허둥대며 설치다가 늘 사고를 치고야 마는 경솔한 분신, 불쑥 떠오른 영감을 주체하지 못해 결단을 급작스럽게 내리는 분신, 레고에 미쳐있다, 책에 미쳐있다, 그러다 또 음악에 미치는, 쉽게 변심하고 변덕 거리는 분신. 내 안에 말 못 할 분신들이 배타적으로 권리를 주도하길 기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주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꽤 이기적인 인간이지만, 그 이기적 태도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진 않다. 그래서 가끔, 어쩌면 자주 겪는 인간적 소외와, 관계에서 겪는 불안, 직장에서든 모임에서든 내가 주도한 사회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온갖 분신이라는 정체성들을 깨운다. 그 정체성들은 전적으로 나를 지지한다. 무엇이 전면으로 나설지라도 나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겉모습의 나일까. 내 정체성(자아) 중에서 하나가 언뜻 고개를 든 것일까. 라캉이 말했든 거울 속 이미지가 실제 정체성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거울에 나타난 표상은 내가 원하는 수많은 이상적 정체성 중의 하나일뿐이다. 나는 그 자아와 혹은 정체성과 호흡을 나누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충돌을 겪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본질적인 '나'로부터 격리시킨다. 거기엔 이상적 정체성이 제거되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대립하거나 연합해가며 이상적 정체성을 만들어가겠지. 어디 이상적 분신이 하나뿐이겠냐만, 그것이 문제다.






https://youtu.be/ZKZoVuifDVE?si=YNJIYTUd7CTyssYJ


도스토옙스키 재미있게 읽기 모임 참여 안내

https://forms.gle/1tbccvn4sA3sD5q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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