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 대뇌의 신경망을 총동원하는 일
글을 읽으면 우리는 어떤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눈은 글자를 따라가느라 바쁘고, 손끝은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코로는 책마다 다른 고유의 향기를 감각하게 된다. 도취, 매혹, 심취와 같은 주관적 감정들이 우리의 내면을 요동치게 한다. 이러한 신경생리학적 감정의 변화는 때로 우리를 더 깊은 의식의 층위로 인도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나만 그런가? 그러면 뭐 할 수 없지만… 극히 드문 경우에 해당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마음의 창발'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묘하고도 강렬한 감정의 세계를 경험한 이들은, 그 체험을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860억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대뇌의 복잡한 신경망을 총동원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수백만 개의 미세한 전기 스파크가 뇌 속에서 춤을 추듯 신경세포들의 화학적, 전기적 작용을 조직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뇌를 풀가동하는 동안, 우리 몸의 다른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휴식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마치 컴퓨터의 CPU가 최대로 가동될 때 다른 프로그램들이 대기 상태로 들어가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우리 신체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뇌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뇌세포의 노화는 늦출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양날의 검이다. 우리 몸의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한 곳에만 물을 집중적으로 주다 보면 정원의 다른 부분이 메말라버리는 원리와 같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이런 불균형이 아니다. 오히려 뇌부터 발가락 끝까지,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이 조화롭게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건강과 활력을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
글쓰기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디려 고심하는 초심자를 상상해 보자. 그들을 '아마추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글쓰기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 짓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지 의문이다. 마치 무지개의 스펙트럼이 서로 섞여 경계를 알 수 없듯, 글쓰기의 능력과 매력은 개인의 취향과 경험에 따라 다양한 기준으로 선택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에, 다른 이는 풍부한 정보에, 또 다른 이는 깊은 감정이나 강한 동기부여, 혹은 날카로운 논리에 매료된다. 유시민 작가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러니까 재미를 느낄 수 없어서 포기했다고 하니, 개인의 취향이 분명 존재하긴 하나보다. 솔직히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싫다고 말하는 유시민 작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읽다가 이처럼 '좋은 글'의 기준은 마치 양념치킨과 프라이드치킨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처럼 보는 이의 기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좋은 글'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설령 우리가 '좋은 글'에 대한 개인적 정의를 명확히 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식별하는 능력과 실제로 그런 글을 창작해 내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마치 미식가와 요리사의 차이와도 같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완벽한 요리를 감별해 낼 수 있는 미식가의 혜안과, 그 요리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요리사의 기술은 전혀 별개의 영역이다. 우리는 종종 뛰어난 감상자로서의 능력을 창작자의 능력과 혼동하곤 한다. 그러나 문학의 향연을 즐기는 독자와, 그 향연을 차려내는 작가 사이에는 넘어야 할 크나큰 창작의 장벽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좋은 글'을 실컷 즐겁게 쓰는 것,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물론 이 여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게 될 것이다. 덤으로 열패감도 자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글쓰기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초기의 의식적인 노력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글이 스스로 써지는 자동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마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눈을 감은 채로 건반 위를 자유롭게 누비는 것과 같다. 우리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미끄러지며, 마음속 생각들이 물 흐르듯 화면에 펼쳐지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나 역시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여전히 글쓰기의 슬픔과 기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의 조종사 예시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에서 언급된 조종사의 예시를 살펴보자. 숙련된 조종사에게 복잡한 계기판은 더 이상 개별적인 도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이다. 그들은 각각의 게이지와 버튼을 의식적으로 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비행기 전체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느낌적 느낌'에 의존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빵을 먹을 때 매 손가락과 입술과 혀 근육의 움직임을 부러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조종사는 비행기와 한 몸이 되어, 마치 자신의 신체가 연장된 것처럼 항공기를 조종한다. 물론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과 실전 비행을 거쳤을 것이다. 이 고된 여정을 거친 베테랑 조종사는 더 이상 개별 계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대신 수십 개의 계기가 전달하는 복잡한 정보를 하나의 통합된 메시지로 해석하고, 이를 자신의 비행 기술과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글쓰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초보 작가는 마치 고대 로마의 카타콤을 헤매는 듯, 의식적으로 각 단어와 문장을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배치한다. 이 과정은 마치 나만의 리듬을 몸이 새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가며 적절한 어휘를 찾고, 글감을 발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는 마치 우리의 모든 신경 세포가 총동원되어 글쓰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글쓰기가 마치 호흡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의 생각이 손가락의 감각에 의지한 채, 화면 위로 글자가 술술 흘러나오는 글쓰기 창발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의식적인 사고는 뒤로 물러난다. 대신 우리의 손가락이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며 작동한다. 이는 손가락의 촉각이 뇌의 깊은 곳, 아마도 창의성과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을(아마도 전두엽이겠지?)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생각'이라는 것은 오히려 글쓰기를 방해한다. 의식적인 사고에 빠지면 불필요한 잡념들이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비우고, 오로지 우리 몸과 손가락의 감각에만 집중한다. 이는 마치 명상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과 같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의 흐름을 그저 관찰하고 받아들이며, 손가락을 통해 그것을 현실 세계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상투적인 진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는 듯한 느낌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근본적인 진실들은 때때로 재확인되고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 글은 나 자신을 위한 리마인드였을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본질, 그 신비로운 과정에 대한 재발견. 그리고 이 여정을 함께 나누며,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또 다른 이에게는 잊고 있던 진실의 재확인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이 글은 그 존재 의의를 다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