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창작의 중심은 작가다
작가와 창작
작가는 예술과 취미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과정이 바로 창작이다. 하지만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다른 똑똑한 인간이 이미 모두 만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쿄의 지하철역에서 목격한 평범한 출근 풍경을 '양을 쫓는 모험'으로 변모시켰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관점을 바꿔, 기존에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을 혁신적으로 재배열하는 활동으로 해석하는 게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그런데 혁신적이라는 단어는 꽤 범주적이고 추상적이다. 무엇이 진정한 혁신인지 분간이 서질 않는다. '혁신해! 혁신하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던 전 직장 대표의 고성이 귓가에 맴돈다. '뭘 혁신하란 거야? 대표 당신의 정신이나 개조하는 게 좋겠군’이라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아무튼 혁신에 대해선 그만두자.
무엇이든 뛰어넘어야 할 것 같은데, 주어진 목표도 대상도 안개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뛰어넘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나는 '작가로서 글이라는 수단으로 나와 세상을 표현하고 연결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라흐마니노프처럼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거나 고흐처럼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릴 재능이 없으니, 대신 언어로 리듬을 타고 글에서 전하는 미묘한 뉘앙스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 하지만 글쓰기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관찰력이 필요하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이런 아집에서 벗어나기 꽤 힘들다. 세상의 중심은 나를 제외한 어떤 통일된 우주적 질서로 돌아간다. 나를 거기로 보내고 싶다. 이것은 관찰력이 상상력으로 승화된 상태다. 그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춤추며 놀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바라볼 대상은 외부 세계에 있다. 그 세계를 어떤 렌즈로 바라보고 어떤 감성으로 느끼고 해석할지에 따라 창작은 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수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어쨌든 스스로를 가둔 알의 껍질을 뚫고 세상으로 박차고 나와야 한다. 내면의 울타리를 넘어 외부 세계로 나를 확장시킬 때, 경험에 뛰어들 수 있는 의지가 촉발된다. 관찰하고 대담하게 상상하는 일, 더 깊게 상상하기 위해 세상에 주저 없이 뛰어드는 일, 그것의 창작의 기본이 아닐까.
나에겐 시스템(툴)이 필요하다고!
시스템은 목적을 쉽게 달성하기 위해 도와주는 도구다. 도구에는 인간의 지혜와 경험들이 집약되어 있다. 마치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처럼 그것은 세대를 거듭하며 진화했다. 외부의 자원을 입력해서 내부의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 다시 바깥으로 결과물을 출력하는 것이 시스템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일은 정교한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없다고 부정해도 그냥 우긴다. 어떤 사람들은(당신은 아니겠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메모하는 습관조차 없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운다. 그 고민은 AI라는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만든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래서 Claude를 쓸지, 챗GPT를 쓸지 고민하느라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다. 스스로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마치 대필 작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와 같다. 바쁘다는 핑계로 입력과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결과인 글만 완성하겠다는 못된 심보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3D 프린트로 찍어내놓고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AI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도 성격이 급한 이들에겐 아주 중요하다. 옵시디언이나 노션과 같은 툴이 좋은 예다. 옵시디언을 쓰면 마법처럼 세컨드 브레인이 저절로 구축될 것이라 기대하고, 노션을 쓰면 5분 만에 프로페셔널한 포트폴리오 홈페이지가 뚝딱 만들어질 것 같다.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 사용한 붓이 아무리 좋았다 한들, 그의 천재성과 노력 없이는 그 걸작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단지 우리의 창의성을 보조할 뿐, 그 자체로 창의성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도구만 그럴듯하게 갖추면 별다른 노력 없이 대단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다.
인간은 시스템을 활용한다
'시스템'이라는 신흥 종교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창작에 필요한 고뇌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에서 문제점을 역설적으로 찾아내는 과정은 고되다. 사람을 지치고 괴롭게 만든다. 과정을 견디기에는 참을성이 모자란다. 시스템의 신에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곤 고개를 조아린다. 세상의 흐름을 관찰하며 상상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의 신에게 기도란 올리며 두 손을 비비기만 한다.
물론 시스템의 도움 없이 창작이 성공하는 경우는 희박하다. '빅뱅이 먼저인가, 우주가 먼저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순환논리에 빠진 어리석은 생각이다. 시스템은 작가의 의지와 경험이 더해지고, 그것들이 오래도록 축적되다, 어느 순간에 '티핑 포인트'에서 창작의 폭발이 일어난다. AI가 단순한 패턴 인식에서 추론이 가능한 AGI 급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은 상상하지 못할 방대한 데이터의 누적과 끊임없는 학습의 경험들이 쌓여 가능해진 것이다. 구글의 AlphaGo가 바둑 챔피언 이세돌을 이기기까지의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창작은 마치 황무지에 정원을 일구는 것과 같다. 먼저 텅 빈 땅에 지식이라는 비옥한 토양을 깔아야 한다. 그 위에 상상력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꾸준히 물을 주며 가꾸어야 한다. 그러다, 인내의 시간을 거쳐 작품이라는 열매가 피어나는 것이다. 창작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경험들을 꾸준히 기록하고 내면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일은 정원사가 매일 흙을 갈고 잡초를 뽑는 것과 같다.
관찰력을 키우자. 거기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경험한다. 남들이 보지 못한, 그러니까 숨은 틈을 집요하게 찾는다. 거기서 억지로라도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 대상을 나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을 글로 옮긴다. 그리고 반복 또 반복한다. 지루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무의식적인 흐름이 되도록 반복한다.
최종적으로 누적된 생각들을 모아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 기존의 생각을 재해석하고 자기비판적으로 과거의 틀을 다시 고친다. 단,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 유연하게 생각하고 새로운 패턴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몸속에 흐르는 기존의 범주에 새로운 사고를 편입시킨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생각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연결고리로 맺어진다.
창작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지루한 반복에 익숙해지고 개미가 한 알 한 알 모래를 나르듯 무덤 하게 자신만의 지식을 쌓아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개선하며 스스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문제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럴 때 시스템을 활용하면 된다. 축적된 지식이 시스템과 결합될 때, 낯선 세상, 새로운 나만의 우주가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잡아간다. 그것이 작품을 탄생시키는 작가의 숭고한 여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