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창작의 중심은 작가다
“석현 씨는 뭘 해도 잘 될 것 같아요!”
이 말은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에 방문했을 때, 협회 간사가 내게 던진 일종의 예언이었다. 창업경진대회 수상자들에게 주어진 특전으로 방문한 그곳에서, 나는 연구소의 첨단 기술을 소개받는 동안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듣기만 할 때, 나의 펜 끝은 바삐 움직였는데 아마 그 모습이 간사에게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의 칭찬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과연 '뭘 해도 잘 됐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순간의 열정만큼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회의 때, 메모는 기본이다.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회의 내용을 메모한다. 다만 나만의 관점으로 필터링해서 적는다. 내 손에 수첩이 있었고 볼펜이 쥐어진 것이 전부였다. 첨단 연구소의 기술이나 시스템에서 배운 것을 나중에 써먹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메모가 나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줄 거라 기대도 없었다. 그저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습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메모는 습관이다. 그냥 습관처럼 노트를 들고 기록하는 게 전부다. 콘텐츠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이게 쓸모가 있는 거야?’, ‘이런 사소한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때로 현실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왜곡하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어떤 일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메모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작가를 만드는 메모란 무엇인지’ 한 번 곱씹어 보자. 작가가 되는 것은 원대한 목표지만, 메모는 그 목표를 향한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다. 이 매거진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클릭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메모는 얼핏 보기에 하찮고 귀찮은 작업처럼 보인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작가라는 거창한 목표와 연결될 수 있을지, 그 관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종종 지름길을 갈망한다. 피땀 흘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건너뛰고 바로 작가가 되는 쾌속 코스의 티켓을 끊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냉혹하다. 메모는커녕 블로그에서 글조차 쓰지 않은 사람에게 작가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작가가 되는 찬란한 순간을 꿈꾸기만 하거나 그 순간에 찾아올 명예와 부를 상상하는 사람에게 작가는 영원한 꿈으로만 남을 터.
그러니까 작가를 만드는 메모는 마치 작은 시냇물 같다. 미세한 물줄기는 끊임없이 흘러 세상에 자신만의 흔적을 새기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 위에서 무심코 흐르던 그 물줄기가 광활한 바다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 시냇물에게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일이다. 흐름이 느려지거나 일시적으로 정체될 수 있지만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그 길에서 다른 시냇물과 더불어 바다를 향해 계속 흘러야 한다.
작은 시냇물은 메모에 담은 작은 염원들, 우리의 소망을 담은 역사의 기록물 들이다. 언젠가 작가가 될 때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의식의 수면 위에 잠시 떠올랐다가 무심결에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하지만 메모할 때마다, 소망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가라앉아버렸다는 것은 흐름이 영영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IT 개발자로서 나는 이를 ‘링크드 리스트’로 비유하곤 한다. 링크드 리스트는 기차의 객차를 연상해 보면 된다. 우리가 메모한 하나의 생각은 객차 하나하나를 대표한다. 그 객차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단단히 하나의 열차라는 개념을 이룬다. 하나의 객차에는 메모가 실려 있다. 그다음 객차에는 앞 칸에 실린 메모에서 파생된 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앉아 있다. 이런 칸들은 무한하게 긴 열차처럼 머릿속에 배열을 만든다.
만약, 여정 중에 탈선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작가의 꿈을 향해 가는 길, 아니 그 꿈의 실현 여부는 예측할 수 없지만 꾸준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어느 날 스스로 단념해버린 상황을 상상해 보자. 위에서처럼, ‘대체 이런 하찮은 메모가 어떻게 작가를 만든단 말이야!’라고 절규하며, 정성스레 연결해 온 열차의 중간을 무참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탈선 사고를 일으켜 버린 것이다.
나는 구글 킵에 그런 기차를 수백 개쯤 만든 것 같다. 어쩌면 수천 개일 지도 모른다. 디만 칸이 몇 개뿐인 소박한 협궤 열차 같은 것이다. 책을 읽다 마주친 통찰력 있는 문장이나,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를 파편적으로 기록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 과정에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방대하게 지식 네트워크를 구축해 두자. 얼마나 방대하게 구축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추상적이더라도 구축해 놓으면 언젠가 그 쓰임새가 생기겠지’,라고 기대하며 기록을 이어갔다.
돌이켜 보니, 나의 이런 무의식적인 메모 습관은 일종의 미래에 대한 투자였던 것 같다. 마치 '지금의 나는 아니더라도, 미래의 내가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묵시적 믿음이 있었다. 현재의 나는 눈앞의 현실에 충실하고, 미래의 나는 그 기록들로부터 의미를 창출해 낼 것이라 기대했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과거의 내가 성실히 남긴 메모들, 그 속에 담긴 사유와 의지는 타인의 생각을 내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메모는 언제나 어떤 창발적 순간을 품고 있는 듯하다. 설령 무의식적으로 메모를 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 나의 집중과 감정은 고스란히 그 속에 녹아있다. 이 모든 것이 내 구글 킵에, 그리고 지금은 노션에 담겨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기록에만 치중했다면, 노션을 사용하는 현재의 나는 이 파편들 간의 연결성에 집착하며 더욱 의미 있는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
새로운 메모를 작성할 때, 나도 모르게 기존 메모와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럴 때 개념의 범주가 확장되고 새로운 통찰이 태어난다. 메모는 경험의 결과다. 책을 읽으며 느낀 생각이든 카페에서 누군가와 만나 소통하다 찾아온 인사이트든, 그것이 메모라는 형태로 저장될 때, 메모라는 객차에 새로운 객차가 연결되는 것이다. 마치 IT의 링크드 리스트처럼 메모도 연결되어야 의미를 발산한다. 단절된 메모는 버려진 뉴런처럼 영원히 기능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연결하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반복하기는 꽤 어렵다. 의식 없이 그저 귀납적으로 메모 정도야 꾸준히 쌓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과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목표의 설정이다. ‘작가가 되고야 말겠어!’라고 선언했다면, 무엇을 만드는 작가가 되어야 할지 결정하고 어떤 글을 쓸 것이며 어떻게 작가가 될지 필요한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메모하는 과정을 경험했다면, 분명한 목표를 결정하게 되면 그쪽으로 방향을 맞춰놓고 메모도 일정하게 나아가도록 흐름을 고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마치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우리의 생각은 쉼 없이 이곳저곳을 맴돈다. 이는 인간 사고의 진화적 특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작가'라는 특정 목표를 향해 이 사고의 흐름을 집중시키고 싶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메모를 작성할 때마다 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연역적으로 사고하며 주제를 선정해 놓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글쓰기에 몰두해야 한다. 단순히 글을 쓰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집요하리만치 목표에 집중하며, 현재의 사고가 어떻게 궁극적 목표와 연결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며 기록해야 한다.
미루어 보건대, 이런 방법으로 한 가지 분야에 익숙해지고 숙달이 되면 우리의 뇌는 그것과 엇비슷한 지식으로 무의식적인 연결고리를 만든다.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낯선 경험을 할 때, 우리의 지각은 그쪽에 맞게 스스로 변화한다. 뇌의 신경 가소성 덕분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의 눈에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잠재적인 글감으로 비친다. 심지어 타인의 사소한 대화조차 글쓰기의 소재로 연결된다. 이처럼 우리의 뇌가 창의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은, 기존에 축적된 사고와 새로운 경험이 만나 예기치 못한 연결을 이룰 때 발생한다. 마치 'Serendipity'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는 종종 우연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돌이켜 보면, 독일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간사가 던진 그 한마디가, 예상치 못한 미래로의 길을 열어준 나비효과와 같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작은 생각이 기록된 메모들이 어떻게 작가를 만드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됐는지 그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