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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Aug 19. 2020

사라진 '블록버스터급' 그녀!

<르네상스 특집 1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911년 8월 20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해가 집니다. 미술관이 문 닫을 준비를 합니다. 마지막 방문객이 빠져나갑니다. 불이 꺼지고, 이내 어둠이 밀려옵니다. 이때,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성입니다. 호주머니에는 온갖 공구들이 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모나리자(1503∼1506) 앞에 섭니다.


   보안용 유리벽을 뜯더니, 가족사진 챙기듯 그림을 떼냅니다. 검은 천으로 싸고는 쪽문으로 빠져나갑니다. 하필 문이 잠겨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경비원이 문을 열어줍니다. 고작 몇 분 사이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6세기의 여인은 이렇게 허무히 사라집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다음 날. 화가 루이 베루(Louis Beroud)가 텅 빈 루브르 미술관 안을 걷습니다. 당시 루브르 미술관은 문을 닫는 월요일엔 화가 몇 명을 불러 명화를 베껴 그릴 권한을 줬습니다. 루이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날 오전 모나리자가 있는 전시관인 '살로아페'로 갑니다. 


   뭘 봤을까요? 모나리자가 있어야 할 벽면에 텅 비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경비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의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모나리자는 철통 방어 속에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델이 된 여성 모두 원숙미가 절정에 달한 시점에 나온 작품인 만큼, 이미 '톱 클래스' 대우를 받고 있던 것입니다. 


   루이의 말이 공허히 들린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은 때마침 도록을 펴내기 위해 모든 명화에 대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화 이동이 잦은 때였지요. 이번에는 모나리자를 촬영할 때구나, 으레 이같이 생각하기 쉬운 시기였습니다. 결국 루브르 미술관이 모나리자의 도난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정오가 다 될 때였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 뒤집어집니다. 프랑스 전체가 '패닉'에 빠집니다. 관장과 감시반장, 경비팀장은 해고됩니다. 루브르 미술관은 무기한으로 문을 닫습니다. 프랑스는 국경 전체를 폐쇄합니다. 경찰 수천명이 투입, '사라진 그녀'를 찾는 데 집중합니다.


   루브르 미술관 측은 의문스러운 점을 봅니다. 보안 기술자로 일하던 직원 한 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또, 그가 이전에도 루브르 미술관의 소장품을 훔쳐 판 전적이 있다던 이야기도 퍼집니다. 경찰과 루브르 미술관 측은 그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프랑스가 갖는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습니다. 너무 다급했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벌입니다. 프랑스는 당시 명성을 쌓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시인 겸 소설가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도 용의 선상에 넣습니다. 


   경찰의 당시 말을 들어볼까요?


   "사라진 보안 기술자가 피카소에게 루브르 미술관 내 조각상을 판 적이 있다."

   "아폴리네르의 옛 조수가 실종된 보안 기술자였다고 한다."


   그저 순진했을 뿐이었던 피카소는 조사 후 혐의를 벗습니다. 불쌍한 아폴리네르는 닷새간 구류됩니다. 모나리자는 이 덕분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1913년. 루브르 미술관이 모나리자 찾기를 사실상 포기한 시기였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의 작품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가 들어섭니다. 루브르 미술관이 차츰 활력을 되찾을 때입니다. 


   그때쯤,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상인 알프레도 게리는 한 통을 편지를 받습니다. '나는 지금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갖고 있소. 한때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뺏은 그 자존심 말이오.' 그는 이를 허투루 보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면 레오나르도, 나폴레옹이 뺏은 것이라면 모나리자가 아닐까. 알프레도는 돈 두둑한 화상 행세를 하며, 관심이 가득 담긴 답장을 보냅니다. 유력가와 함께 가겠다며 약속을 잡습니다. 


   낯선 남자가 보인 이 작품, 모나리자가 맞습니다.


   그때 고객 모습을 한 감정사가 레오나르도의 지문이 묻은 것을 결정적 증거로 내놨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 감정사가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 관장이었다는 말도 있죠. 낯선 남자가 제시한 값은 10만 달러라고 전해집니다. 그는 그 돈을 구경도 못하고, 잠복한 경찰에게 붙잡힙니다.





   빈센초 페루지아. 


   루브르 박물관의 보안 기술자였던 그는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이 맞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2년간 루브르 미술관 근처 자신의 아파트 다락방에 돌돌 말아 숨겼다고 합니다. 


   이제 범인을 잡았으니, 뒤늦게나마 이번 일은 일사천리로 종결될 수 있었겠죠?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또 다른 이슈를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빈센초의 대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졌습니다. 그가 모나리자를 훔친 데 따른 죗값은 뭐였을까요. 징역 3개월입니다. 고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조국 이탈리아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나는 프랑스가 약탈한 국보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빈센초는 알프레도에게 보낸 편지 글과 비슷한 말을 변론으로 꺼냅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 말에 호응합니다. 애국 행동이었다며, 그를 국가의 영웅으로 칭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검찰은 징역 1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가 이를 7개월로 줄이고, 이마저도 가벼워저 3개월이 된 것입니다. 


   프랑스는 찝찝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모나리자를 탈 없이 돌려받고 싶은 염려, 작품이 무사하다는 데 따른 기쁨 등으로 처벌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게리는 2만5000프랑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의 보상을 받습니다. 


   이탈리아는 고별이란 명목으로 전국에서 순회 전시회를 엽니다.


   프랑스가 모나리자를 돌려받은 때는 빈센초가 붙잡힌 후 28개월이 지나서였습니다. 




   빈센초는 단지 이 이유로 모나리자를 훔쳤을까요. 


   1932년, 미국의 주간지인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보죠. 칼 데커 기자가 쓴 기사 '왜, 그리고 어떻게 모나리자가 도난됐을까'입니다. 그는 빈센초가 사실상 얼굴 마담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썼습니다. 에드아르도 드 발피에르노, 미술품 전문 밀매꾼인 이 사람이 주도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에드아르도는 모나리자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 비싼 값에 팔기 위해 모나리자를 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미 미술 위조 전문가인 이브 쇼드롱과 작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에드아르도는 그쯤 루브르 미술관 내 모든 액자에 덧대는 보안유리 장치에 관여한 빈센초를 만납니다. 에드아르도 입장에선 이보다 더 맞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드아르도의 위작들은 모나리자가 사라진 후 남미 등 부호에게 모두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빈센초도 큰 돈을 받았지만, 이를 모두 써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모나리자 진품을 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고. 이는 계획에 전혀 없는 일이었다고. 칼은 1931년 에드아르도가 죽기 직전 이같은 내용을 폭로했다고 밝혔습니다. 빈센초는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킵니다. 그는 안락한 삶을 살고 생을 마감합니다. 진실 여부를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만 실제로 모작 6점이 발견됐고, 그 주인 모두 이를 진품으로 여겨 '은밀한 즐거움'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모나리자는 이 사건을 겪은 후 더욱 유명해집니다.


   현재 감정가는 최소 2조원에서 최대 40조원이라고 하죠. 사실, 지금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부르는 게 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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