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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Aug 16. 2020

눈을 찌른 광인, '조선의 반 고흐'를 아시나요?

<5. 최북, '공산무인도'> 

   "아이고! 저런 미친 자를 봤나."


   18세기, 조선시대 한양. 구부정한 늙은 남성이 도망치듯 뛰쳐나옵니다. 돈 꽤나 있는 양반 같은데, 무슨 일로 낡은 초가집을 찾았을까요.


   "썩 꺼져버려!"


   또 다른 남성이 외칩니다. 낡은 옷, 정돈되지 않은 더벅머리, 걸걸한 목소리…. 앞선 이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남루합니다. 그런 그가 밖으로 나와 호통을 칩니다. 그런데, 이 남성의 모습이 심상찮습니다. 오른쪽 눈에서 피가 흐릅니다. 마룻바닥에 가득 고일만큼 철철 흘러내립니다. 한 손에는 피로 물든 송곳을 쥐고 있습니다. 쌍욕을 퍼붓는 그의 모습은 섬뜩할 지경입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최북, 공산무인도.


   적막합니다. 인기척도 없고, 동물 흔적조차 없습니다. 나무도, 바위도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정자도 고요합니다. 텅 빈 산입니다. 심심한 분위기 같지만, 그렇다고 쓸쓸함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화가 최북(1720~미상)이 그린 '공산무인도'입니다.


   왼쪽부터 볼까요. 계곡물이 옅은 물줄기를 안고 흐릅니다. 위에서 아래로 성실히 떨어집니다. 노송과 색이 섞이는 듯합니다. 물안개를 표현한 듯, 물과 나무가 서로를 감싸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림에서 움직일 수 있는 물체는 이 물줄기 뿐이지만, 이마저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오른쪽은요. 적막이 점차 커집니다. 정자도, 옆나무도 사람 손을 탄지 오래된 듯합니다. 배경이 된 산은 한가운데서 흔적만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상 생략됐지요. 그림에 담긴 화제(題)를 보겠습니다. '인적 없는 텅 빈 산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空山無人 水流花開) 중국 시인 왕유(王維)의 시입니다. 이 그림은 그가 쓴 시를 도화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산은 아무도 없어도 산이다, 꽃은 누구 손을 타지 않아도 때맞춰 핀다…. 이 그림에는 텅 빈 곳은 채워야 한다, 멈춘 것은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강박이 없습니다. 적막이 고독으로 이어지지 않던 이유,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다시 18세기입니다. 쫓겨난 이는 고위 관리였습니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는 이는 최북이었고요. 그가 당시 유명화가란 점은 윗 그림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고위 관리는 최북에게 그림을 부탁했습니다. 문제는 바라는 게 많았다는 점입니다. 경험 없는 이가 하는 실수입니다. 최북이 실소했겠지요. 고위 관리가 이에 협박을 했답니다. 최북은 그 말을 가만히 듣더니, 도구함에서 송곳을 꺼냅니다. "남이 나를 어찌하기 앞서,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거야!" 자기 눈을 뾰족한 끝으로 찌릅니다. 화산 폭발하듯 피가 터집니다. 기세등등하던 고위 관리는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저런 고얀 환쟁이를 봤나. 그림을 내놓지 않으면, 네놈을 끌고 가 주리를 틀 것이야.'

 '낯짝에 똥을 뿌릴까 보다. 너 같은 놈이 이 최북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겠다.' 

 최북이 침을 퇴퇴 뱉고는, 필통에서 송곳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양반' 앞에서 송곳으로 눈 하나를 팍 찌르는 것이 아닌가. 금세 눈에서 피가 뻗쳤다. 비로소 그가 놀라 말에 오르지도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눈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민병삼, <칠칠 최 북: 거기에 내가 있었다(2012)> 일부 발췌.


   최북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래서일까요. 그의 일화는 다채롭습니다. 최북이 금강산을 찾은 때입니다. 그는 실컷 먹고 마시면서 정처없이 떠돕니다. 그런 그가 구룡연(九龍淵)을 보더니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멈춥니다. "천하 명인 최북이는 당연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투신하기 직전 던진 말입니다. 그러고는 잊은 것을 갑자기 찾은 사람처럼 미련 없이 몸을 던집니다. 다행히 보는 사람들이 있어 목숨을 건집니다. 나뭇가지에 걸려 살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그때도 울다 웃으면서 가던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가 거지와 부자를 대하는 태도도 인상 깊습니다.


   거지에겐 돈 몇 푼에 정성껏 그림을 내줬습니다. 돈 보따리를 들고 온 부자에게는요? 산수화를 청한 부자에겐 산만 있는 그림을 내줬습니다. 이에 항의하면 "이놈아, 그림 밖에 온통 다 물이야!"라고 성질을 냈다네요. 힘 쏟은 그림이 헐값에 팔리면 역정, 대충 그린 그림이 비싸게 팔리면 "저놈들은 그림 볼 줄도 모른다"며 비아냥, 자기 그림이라 해도 기분이 나빠지면 찢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기인도 이런 기인이 없습니다.



 

최북, 제목 없음(후대 사람들이 '산수화'란 이름을 붙임)


   최북을 칭하는 별명도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는 당대 최정상 화가였습니다. 그 스스로 "내가 단원 김홍도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죠. 유명도에 맞춰 수많은 별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최북의 본명부터 보죠. 원래 이름은 최식(植)입니다. 서른께 스스로 이름을 고쳐 북(北)이라고 합니다. 북쪽이란 애초 햇볕 한 점 볼 수 없는 구석, 삭풍이 밀려오는 방향입니다. 그가 자신의 고독했던 생을 돌이켜보고는  맞춤형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최북의 자는 칠칠(七七)입니다. 북(北)을 다시 쪼갰습니다. 자신을 '그림이나 그려 먹고 사는 칠칠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최북은 왜 스스로를 비하했을까요. 신분 때문입니다. 그가 살던 18세기 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였습니다. 최북의 아버지는 중인이었습니다. 직업은 산원(算員), 지금으로 치면 경리입니다. 중인이면 양반과 상민 사이 나름대로 그럴듯한 신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양반이 아니면 누구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노비, 농민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지낼 수 있을 뿐이었죠. 최북은 어릴 때부터 많은 차별을 겪고 봤을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것 하나 배우지 않고 당시 천대 받던 그림만 익힌 사람입니다. 상처를 입었을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양반 사회에 경멸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웬만한 양반보다 더 대접받게 된 때에도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겠지요. 자기 비하는 세상을 향한 울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북은 괴팍했습니다. 변덕이 심해 어디로 튈지 몰랐습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요. 광생(狂生)이란 말이 붙은 까닭입니다. 그림 말고 별 다른 재주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림 실력이 없었다면 누가 말이라도 붙여줬을까요. 호생관(毫生館). 풀이하면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붙은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산수에 능했다고 해 최산수, 메추리를 잘 그려 최메추리(최북의 어머니가 그의 눈이 메추리를 닮았다고 해 붙인 별명이란 설도 있습니다). 지금은 '조선의 반고흐'란 별명이 붙었죠.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잘라냈듯, 그가 스스로 눈을 찌른 일화를 바탕으로요.


최북 초상화.


   최북의 초상화입니다. 이한철(1808~?)의 작품입니다. 스스로 찌른 오른쪽 눈이 인상적입니다. 담담한 눈, 꾹 다문 입, 꼿꼿한 자세. 타협을 모르는 분위기가 뚝뚝 흐릅니다. 최북의 삶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인정 받는 화가였지만, 도화서란 그림 전문 관청에선 절대 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출퇴근을 반복하는 게 싫어서요. 명령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일 또한 질색이었습니다. 이미 도화서에 몸 담은 단원 김홍도의 밑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볼 때 김홍도는 영달에 눈 먼 겸업화가에 불과했습니다. 수시로 추천을 받았지만 모두 단칼에 거절했죠. 문화 꽃이 활짝 핀 영조와 정조의 시대. 유명해질수록 얻을 건 부와 명예 뿐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장안에서 그림 파는 최북이를 보소 
   살림살이란 오막살이에 네 벽은 텅 비었는데 
   문을 닫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대네 
   유리 안경 집어 쓰고 나무 필통 끌어내어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어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고…

   석북(石北) 신광수, <'설강도'에 부치는 시> 중 일부 발췌.


   다행일까요. 그림을 든 최북이 평양이나 동래 등지에 나서면 많은 이가 몰렸다고 하네요.


   최북의 최후는 객사입니다. 그는 스스로 환쟁이를 택한 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립니다.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십니다. 하루에 대여섯 되씩 마셨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책을 팔아 충당했다네요. 경치 좋은 곳을 돌아다닙니다. 그래봤자 중인, 그래봤자 도화서에 취업하지 않은 화가. 수입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그 성격 탓에 점점 그를 찾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날과 같이 술에 취해 거리를 나섭니다. 기력 탓일까요. 그는 쓰러집니다. 삶을 허무하게 마감합니다. '칠칠'이란 자에 맞게 49세 때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아닌듯 하네요. 그의 또래친구 신광하가 75세쯤 최북가를 지은 것으로 봐, 75세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최북이가 눈 속에서 죽은 것을. 
   …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폭 팔더니 
   어느날 크게 취하여 한밤중 돌아오는 길 성곽 구석에 쓰러졌다네. 
   내 다시 묻건대 북망산 진흙 속엔 만인의 뼈가 묻혔거늘 
   어찌하여 최북이는 삼장설에 묻혔단 말인가. 
   오호라, 최북의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신광하, <최북가> 중 일부 발췌.


   당시 최북의 죽음을 묘사한 시입니다. 그를 기리는 글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2년은 최북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최북 탄신 300주년 기념 전시'를 연 바 있습니다. 최북을 기리는 공간은 어딨을까요. 그의 고향 무주에 있는 '최북미술관'이 대표적 공간입니다. 작품 60여점과 일화를 볼 수 있는 영상관, 메추리를 그릴 수 있는 체험장 등이 있는 곳입니다. 대표적 소장작은 '일출', '기우귀가도', '수하독서도' 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밖에 국립광주박물관은 '한강조어도'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 소장 작품에는 '공산무인도'와 함께 '조어도'와 '풍설야귀도'가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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