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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11. 2020

그 사람이 '고귀한 자'라니, 나 원 참

<속사정 특집 2 : 폴 고갱>


 서머셋 모옴의 책 《달과 6펜스(1919)》로 인해 '고귀한 자'란 이미지를 얻었지만, 폴 고갱은 사실 동물적 본능에 더 친숙한 남자였습니다.


 파리에서 살았고, 타히티에서도 그림을 그렸으며,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이 만큼의 내용을 빼면, 폴 고갱과 찰스 스트릭랜드의 생은 전혀 달랐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입니다.




폴 고갱, 자화상(1893)


 고갱은 고귀함과는 가깝지 않았습니다.


 고갱의 표정, 몸짓의 '기본값'은 이 자화상과 같았습니다. 그림만 보더라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순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요. 그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습니다. 남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데 천부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에 못지않은 농도의 근성과 성실함을 갖췄지만, 이 부분을 앞세워 생을 미화하기에는 그는 굉장히 속물적이었습니다.


 그림에 제대로 몸을 던지기 전 고갱은 파리에서 잘나가는 증권 거래상이었습니다. 연봉도, 대우도 괜찮았습니다. 덴마크 출신의 여성 메테 소피와 결혼한 후 자녀 5명도 품고 있었습니다.


 1882년. 그는 "일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파리의 주식시장이 붕괴해, 증권업에 속한 사람 상당수가 망한 시기였습니다. 고갱도 쫄딱 망했습니다. 그는 현역 시절 나름의 사업 수완을 발휘해 미술거래업도 중개했었는데, 이런 연줄이 있으니 제대로 된 그림만 그린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꿈을 이루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의 아내 또한 아이들을 보면 앞길이 막막하다가도, 처음에는 응원하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고갱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를 알 수 없었겠지요. 어찌 됐든, 다섯 남매의 가장이니까요.


 고갱은 족쇄가 풀린 양 그림을 그립니다.


 에드가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등 괴물들이 살던 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시커먼 남자의 그림을 살 사람은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식당 서빙 일을 깔짝깔짝했지만, 이마저도 손님과 다투면서 손해만 보기 일쑤였습니다. 붓을 쥐지 않을 때는 주로 일명 '파리의 초신성'들과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물론 거기서도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워 금방 아웃사이더가 됐지만요.


 그에게는 가정 또한 하나의 족쇄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클로비스가 굶든, 피부병에 걸려 몸을 벅벅 긁어대든 상관없이 자신이 숙명으로 놓은 그림에만 전념합니다.


 그가 꽤 이른 시일 안에 나름의 '고갱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던 까닭, 마땅히 챙겼어야 할 가족의 신음을 애써 외면했기 때문 일지도요.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년 빈센트 반 고흐와 '노란 집'에서 함께 생활했을 때의 한 일화도 그의 배려 없는 성격을 보여줍니다.


 연말쯤, 고갱은 집 안에서 빈센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의자 위 해바라기 다섯 송이가 있는 화병을 올려놓고 붓을 들고 있는 빈센트를 옆에서 보고 화폭에 담았습니다.


 고갱은 빈센트를 '굳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림 속 빈센트는 코와 이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낮고 평평합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양 그려 기운도 없어 보입니다. 얼핏 봐도 친구를 그렸다기보단, 정신병원에서 만난 환자를 그린 것 같습니다. 빈센트는 이에 "나 같기는 한데, 어째 제정신이 아닌 것 같네"라고 했다지요. 고갱은 그에게 집을 내주고, 생계의 일부도 책임진 빈센트의 이런 말을 듣고는 되레 화를 냈다고 합니다.


 빈센트는 그쯤 테오에게 "고갱이 내 초상화를 그리고 있어. 그건 쓸데없는 짓이야"라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고흐가 미쳐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랐을 때, 이때도 고갱의 평소 성격을 보면 그가 먼저 고흐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폴 고갱, 무슨 일 있어?

 가족, 동료의 희생을 밟고 그림을 '쫌' 그리게 된 고갱은 돌연 파리의 미술은 시시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스승으로 칭해지는 카미유 피사로까지 모욕하면서요.


 피사로는 이에 "자신을 천재로 인식시키는 데 급급한 사람이며, 누구든 자신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면 박살을 냈다"고 악평을 남겼습니다.


 젊었을 적 견습 도선사로 있으면서 고대문명에 감탄한 바 있는 그는 그 경험을 되살려 남태평양 중부에 있는 타히티섬으로 갑니다.


 원시 문명에서 예술혼을 일깨워오겠다, 호언장담했습니다. 나름의 문명화가 된 타히티는 프랑스 말로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곳이었는데도, 마치 대단한 미지의 세계를 다녀오는 양 스스로를 포장했습니다.


 그는 돈도 없고, 그림도 생각보다 안 팔리는 데 따라 은근슬쩍 다시 프랑스로 옵니다. 그런데 때마침 죽은 친척에게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고는, 도박중독자처럼 다시 타히티로 떠납니다.


 이 사이에 그의 가족은요. 고갱이 유산을 몽땅 움켜쥐고 떠난 탓에 단 한 푼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덴마크에서 홀로 힘겹게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결국, 5명 중 3명이 순차적으로 픽픽 쓰러지곤, 다시 눈을 뜨지 못합니다.


 그러던 사이에 고갱은요. 돌아간 타히티에서 또다시 현지 여성들과 결혼, 동거를 거듭했습니다. 이 중에는 13~15살 정도의 미성년자도 있었다고 하지요. 몸 간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매독을 달고 다녔으며, 치고받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몸 곳곳의 뼈도 성치 못했습니다. 


   고갱은 이때쯤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란 대작을 완성했지만, 이는 그의 가족이 흘린 눈물을 제물 삼아 나온 작품이었습니다.




폴 고갱, 말년의 자화상

 고갱은 좀 더 문명화가 덜 진행된 히바오아에서 죽습니다.


 말년의 그는 타히티와 히바오아에서조차 민심을 얻지 못해 알코올 중독과 매독 악화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이미 이곳에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퉜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일관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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