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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17. 2020

파리, 파리, 오직 파리에만 중독되어

<19. 모리스 위트릴로, '파리'>

   1900년대 초 겨울, 일요일 아침. 프랑스 파리를 걷는다고 생각해볼까요. 


   교회를 가기 위해 눈 쌓인 길을 나섭니다. 쌀쌀한 날씨지만, 춥지는 않습니다. 흰 눈이 흰 입김 위로 내려 앉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은 덕일까요. 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야릇한 쾌감이 느껴집니다. 꼬장한 겨울 냄새를 자꾸만 맡고 싶어집니다. 


   교회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니 서서, 앉아서, 누워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왜소하고, 차림새도 허름해보입니다. 노숙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를 피해 빙글 돌아갑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한 후 설교를 듣습니다. 새벽 공기는 벌써 활기찬 낮 공기로 바뀌었습니다. 괜히 그 남자가 생각나 창문을 열어봅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똑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기도 합니다. 잔일을 도와주고나니 벌써 해가 지려고 합니다. 남자는 지금도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중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이 더욱 두꺼워졌다는 것 뿐입니다. 


   "저 남자는 누군가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모르세요? 모리스 위트릴로요." 당시 이 질문을 들은 파리 시민이면 하나 같이 질린 표정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리스 위트릴로, 파리의 풍경


   쓸쓸합니다. 그림만 보는데도 지독히 저밉니다. 사람 표정 하나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난 것 또한 아닙니다. 흔한 거리 풍경인데도 애잔합니다. 얇은 얼음조각 같은 연약한 아픔이 스며듭니다. 계절, 날씨, 공기, 구름, 건물들의 색, 길을 걷는 사람 모두 절절함을 전합니다. 흰색이 그림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모두 같은 흰색이 아닙니다. 짙은 흰색, 옅은 흰색, 누런 녹이 스민 흰색, 돌과 흙에 뒤섞인 흰색, 사람 발자국이 찍힌 흰색. 온갖 흰색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슬픈 흰색이 됐습니다. 짙은 우수를 품은 흰색으로 남게 됐습니다. 녹 냄새가 은은히 납니다. 눈에 절은 돌과 흙 냄새도 나는 것 같습니다. 물을 한가득 머금은 솜이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색이 없는 색이어서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고, 더 오래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교회도 그저 한 덩어리입니다. 기교도 없고, 멋을 내겠다는 고정관념도 없습니다. 막막함, 울컥함 뿐입니다. 


   지금 느낀대로, 겸손도 없고 눈치도 없이 손 가는대로 그린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가 '백색시대' 때 그린 그림입니다.




 

  "위트릴로는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있거나, 벌써 고주망태가 돼 문 밖 시궁창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그는 울고 소리를 지를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매정하게 쫓아냈다. 그는 쓰러지곤 신음하며 또 울었다." 


   위트릴로 평전을 쓴 프란시스 칼코의 묘사입니다. 위트릴로는 당시 파리를 떠도는 유명할 술꾼이었습니다. 파리가 아니었다면 진작 길바닥에 얼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사람들이 질색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위트릴로가 거리의 화가가 된 까닭. 그의 어머니부터 살펴봐야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때 툴루즈 로트레크의 여인, 수잔 발라동이었습니다.


   그녀는 1867년 세탁부의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났습니다. 5살에 파리 땅을 밟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행상, 가정부, 양재사, 공장 여공, 식당 허드렛일 등 잡일을 합니다. 서커스 단원이 된 그녀는 무희를 꿈꾸지만, 15살 무렵 그네에서 떨어지는 일을 겪고는 후유증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결국 서커스단에서 쫓겨나고, 거리의 여인이 됩니다. 


   깊고 푸른 눈동자, 갸름하지만 강한 인상, 퇴폐적인 표정과 몸 자세의 그녀는 파리의 거리를 나도는 처지가 됐습니다. 수잔이 인상주의 그림 모델이 된 건 그 시대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파리 살롱 세계에 발 딛은 그녀는 로트레크, 에드가 드가, 오귀스트 르누와르 등 갖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 모델로 새 삶을 삽니다.  


   그런 수잔은 18세 때 임신합니다. 르누와르의 모델을 끝낸 직후였습니다. 당시 그림 모델들은 화가가 원하면 언제든 옷을 벗었습니다. 육체적 관계도 당연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겠죠. 이 말은 즉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1883년, 수잔은 눈 오는 크리스마스의 다음 날, 홀로 사생아를 낳습니다. 수잔은 옛 남자친구인 시인 미겔 위트릴로의 성을 빌어 '모리스 위트릴로'란 이름을 짓습니다.   




   위트릴로로 다시 시선을 옮겨볼까요. 그의 비정상적 삶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네요. 위트릴로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수잔은 누군가를 돌보기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수잔은 위트릴로를 보모(保姆) 일을 하는 늙은 여인에게 맡깁니다.


   돈이 넉넉치 않았으니, 검증 같은 일은 없었겠죠. 보모는 어린 위트릴로에게 술을 먹입니다. 빨리 재우고 자신도 쉬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중범죄에 해당하겠지만 그 당시엔 이를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위트릴로는 단맛을 알기 전에 쓴맛부터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알콜 중독 증세를 안게 됩니다.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하죠. 위트릴로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 그가 술에 빠지지 않았다면 화가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잔은 좋은 엄마로는 빵 점이었습니다. 다만 위트릴로를 아예 내팽개치진 않았습니다. 그녀 또한 사생아였으니 죄책감을 늘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수잔은 19살이 된 그의 아들에게 붓을 쥐어줍니다. 술을 잊게 할 방법으로 데생을 가르쳤습니다. 


   이미 위트릴로의 삶은 심각히 망가지던 중이었습니다. 알콜 중독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릴 때였죠. 그녀는 그림이 비루한 삶의 동아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녀 또한 당시 로트렉의 도움을 받아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로 자리 잡는 중이었으니까요.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인지, 위트릴로는 곧장 재미를 붙입니다. 그 이후로는 종일 그림만 그립니다. 이미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림에도 비정상적으로 몰두합니다. 


   수잔은 그가 그림에 한창 재미를 느낄 때 가르침을 멈췄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지, 기술까지 가르칠 인내심이 없었던 건지는 모릅니다. 위트릴로는 그런 것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엽서를 주워서는 이를 베낍니다. 눈에 보이는 남의 그림들을 몽땅 따라그립니다. 그러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싶어 혼자서 아무렇게나 그립니다. 


   그의 삶에 끼어든 그림은 결국 그를 술 안에서 건져올린 구명조끼가 됐습니다. 물론, 삶 일부가 된 술은 끊지 못했지만요.



모리스 위트릴로, 사크레-쾨르 대성당
   "내 작품에서 시든 꽃 내음이 풍겼으면 좋겠습니다. 황폐해진 사원 안 꺼져버린 촛 내음이 풍겼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린 가난한 집들, 현실에서 허물어내린다고 해도요." 


   위트릴로의 그림에 기교가 없는 까닭, 그런데도 절절한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위트릴로를 파리만큼은 누구보다 잘 그린 화가라고 말했지요. 왜냐면, 정말 파리밖에 그리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탓입니다. 그는 하나에만 몰두하는 게 거의 자폐증 환자 같았습니다. 물론 정물도 그리고 다른 풍경도 그렸지만, 이 그림들은 그가 그린 파리에 비해선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리스 위트릴로, 눈 내린 날 몽마르트 언덕

   위트릴로의 주무대는 몽마르트 언덕이었습니다. 돈 없는 화가들이 몰려 예술 활동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죠. 


   몽마르트 언덕은 당시 조용했습니다. 교회, 성당의 흰 벽을 볼 수 있는 시골 같은 곳이었죠. 가파른 비탈길, 계단 위를 가득 메운 관광객. 역동성의 상징이 된 21세기 몽마르트 언덕과는 전혀 다른 곳이지요. 위트릴로는 붓과 종이를 들고 몽마르트 언덕을 떠돕니다. 근처 클리냥쿠르의 교회와 병원도 맴돕니다. 구석구석 누비면서 수백, 수천번 그립니다. 


   그의 그림에는 다른 화가가 그린 몽마르트 언덕에선 찾을 수 없는 모습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독히 외롭고 고독했던 탓일까요. 그에게만 열린 몽마르트의 세계가 있던 것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신성한 교회, 치유의 병원…. 그의 그림에는 유독 흰색이 어울리는 건물들이 많습니다. 술로 인한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고 싶었을까요. 그 스스로 무결해지고 싶었을까요. 단지 흰 물감을 살 돈밖에 없을 지경이 될 만큼 그림에 몰두했던 걸까요. 


모리스 위트릴로, 잔다르크 거리
모리스 위트릴로, 눈 내린 날 아틀리에 극장

   시간이 지날수록 흰색이 더해집니다. 1908년쯤부터는 흰 물감으로만 파리를 표현할 경지에 오릅니다. 1913년. 화랑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엽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습니다. 사생아의 아들, 알콜 중독자, 거리의 노숙자. 그런 그가 '백색 시대'라는 독자의 조형세계를 만들 때까지 걸은 길입니다.



수잔 발라동, 모리스 위트릴로의 초상

   수잔이 그린 자신의 아들 위트릴로입니다. 말쑥한 게 '파리의 신사' 같습니다. 술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습니다. 꾀죄죄한 차림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실제와 동 떨어진 분위기를 낸 것입니다. 내다버린 자식처럼 키웠다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늘 애정을 품었던 것일까요. 그림으로나마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렇게 온 정성을 쏟은 것일까요.


   "예술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수잔 발라동의 말입니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그의 아들 위트릴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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